종종 어떤 교육과 프로젝트는 사실 FGI, FGW, 서베이 없이 시작되기도 한다. 내가 많이 듣는 말로는 '저희가 옛날에 조사해둔 자료가 있는데 그거 보시면 됩니다' 또는 '비슷한 조사 해둔 게 있으니 안 하셔도 됩니다'이다. 물론, 어떨 땐 내 마음이 더 편하기도 하다. 가끔가다 조직이 나에게 뭔가를 해줄 거라는 기대에 들뜬 인터뷰이들을 볼 때마다 현실과 이상의 까마득한 낙차를 나 혼자 생각하곤 눈을 질끈 감기도 하니까 말이다. 서베이든 FGW든 프로젝트 초반의 활동이 거창해질수록 결과에 대한 실망은 더 커지는 법이다.
번아웃을 다룬 책 '잘나가는 조직은 무엇이 다를까?'는 생뚱맞게 이런 내용을 다룬다. 시작은 이러하다. 아무도 쓰지 않는 탁구대, 건물 옥상에 방치된 배구장을 보며 '그돈시'(그 돈이면 X-bal…)를 외치는 구성원이 나온다. '그 돈이면, 그 돈이면 우리 팀에 사람을 한 명 더 뽑을 텐데! 진정 탁구대와 배구장이 구성원의 니즈(Needs)였습니까!!! 대표님!!!!! 혹은 이걸 진행한 HR이여!!!!' 소수만 사용하는 복지나 조형물은 비아냥거림의 표적이 되기 쉽고, 미용실과 같은 과도한 복지는 필요 이상으로 체류 시간을 길게 만들 뿐이다. 머리는 야근 중에 자르지 말고, 퇴근하고 자르자.
계속해서 이렇게 데이터를 제공하기만 하고, 체감되는 것이 없을 때 구성원은 '학습된 무기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다음 서베이에서는 솔직하게 자신이 느끼는 것을 가리키기보다는 모두 보통(3)을 찍거나, 매우 좋음(5)을 찍고 구글폼의 제출 버튼을 눌러버리게 된다. 그런 결과를 원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매슬랙은 이러한 데이터를 '쓰레기 데이터'라고 부른다.
매년 같은 문항으로 반복되는 데이터, 매년 발표되지 않는 결과, 매년 바뀌지 않는 조직…. 구성원의 진심은 비싸다. 그런 진심을 무료로 요구해 놓고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결과, '아무래도 설문은 좀…'이라는 얘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문항 수가 적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질문, 시의적절한 FGI 시점, 직원의 참여를 주저하게 만들지 않는 프로세스….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고, 이것이 결국 조직의 번아웃을 섬세하게 관리하는 것과 직결된다.
박연준의 '고요한 포옹'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손을 다치는 이유는 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치는 이유는 마음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을 쓰고 싶지 않을 때 숨는다. 정확히는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을 때 숨는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지 싶다. 진심을 썼던 구성원과 담당자가 만나서 서로 다치지 않게 하고 싶으니 그런 것 아닐까.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싶다.
김다혜 플랜비디자인 책임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