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시간이 지나가고 충분히 무기력하지 못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쁜 봄을 맞이하고 있다. 마치 수행해야 하는 업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정체돼 있던 기력이 흐름과 동시에 해야 하는 일들이 쏟아지고 있는 두 달이었다. 본의 아니게 두 달간 80명이 넘는 ‘일하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했고, 관찰한 것은 잊어버리고, 성찰을 위한 여백은 얼마 남지 않았으며, 통찰할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은 3월의 마지막 날이다.
정확히 1년 전에도 인터뷰를 하다 그들 각자가 품은 한이 전이되는 것을 계기로 나의 무기력이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개개인이 가진 관(觀)이 얼마나 매력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며, 마치 나의 관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양, 스스로 심취한 채 그 날카로운 틀로 얼마나 많은 것을 재고 잘랐는지에 대해 회고해 본다. 지난 한 해는 마치 나의 틀을 느슨하게 혹은 더 커다랗게 넓히는 작업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별 모양의 틀보다는 동그란 틀이 버려지는 것을 줄일 수 있듯이 두려움에 잔뜩 찌그러트린 관이 얼마나 많은 생의 선물을 내게로 흐르게 하지 못했던가를 생각한다. 결국 이 경험은 관의 매력도를 평하던 관이 재평가되고, 독특한 모양의 틀보다 느슨하고 커다란 틀이 더 매력적일지도 모른다는 관으로 바뀌어 감에 일조했다.
작년의 한이 맺힌 인터뷰에서 나는 무엇이든 해결해야만 하는 사람의 귀로 듣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려는 욕심에 잠식당했다. 그 후에 뒤따라온 일련의 틀이 변형되는 경험을 통해, 올해의 결코 한이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때에 나는 관찰하는 사람의 귀를 가지고 들어갔다. 공감은 하되,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판단을 해버렸다면, 평가하지 않기로 했다. 평가를 해버렸다면, 해결하지 않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을 해결할 수 있고, 무엇을 해결할 수 없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애씀에 먼저 뛰어들지 않기로 하는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들은 파도처럼 밀려들어 와 쉽사리 되돌아 나가지 못한 채 켜켜이 쌓이며 부족한 수면을 핑계 삼아 평가하고 싶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의 초에 불을 켜고 만 것이다. 마음의 촛불은 두려움을 불쏘시개로 쓰며 잔뜩 달궈진 무의식의 용광로에서 간신히 펼쳐놓은 나의 틀을 자꾸만 찌그러뜨리려는 역학을 펼치려 했다.
이 오만하기 그지없는 찌그러짐은 틀을 통과할 수 있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을 단절시키고, 틀 밖의 것들은 나쁘고 무가치한 것이라며 손가락질하고 헐뜯을 생각에 신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더 좋은 것과 덜 좋은 것들을 줄 세우고, 우월한 것은 옳고, 열등한 것은 그른 것으로, 편리하고 흥미로운 편가르기 게임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혹여나 나조차 나의 틀 밖에 버려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어떻게든 나를 통과시키는 틀이 되도록 합리화되길 바랐다. 내가 틀 안에 있어도 되는 이유를 찾아 끊임없이 정당화하기 바빴으며, 점점 더 작게 쪼그라드는 틀 안에 나를 포함하기 위해서 나는 결코 열등하지 않은 것을 과감히 버릴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나는 다시 외로워질 뻔했다.
우리 사는 세상의 가장 지독한 어쩔 수 없음이 있다면 이 오만함이 아닐까. 더 강렬한 소속감의 도파민을 위해 더 많은 것을 배척해야만 하는,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는 이놈의 관. 인간 지능의 가장 큰 패악이자 우리 사회와 조직을 병들게 하는 이 오만함. 결국 우리에게는 이 뜨거운 오만함을 식힐 여백이 필요한 것이다. 소속되기를 포기함으로써 배척당하지 않을 용기를, 평가하기를 포기함으로써 동등해질 수 있는 용기를, 우월하기를 포기함으로써 열등해지지 않을 용기를, 두려움을 포기함으로써 오만해지지 않을 용기를, 인정받기를 포기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용기를. 매력적이길 포기함으로써 겸손해질 용기를.
오만해지도록 부지런하지 않기로 한다. 외로워지도록 열심이지 않기로 한다. 문서 하나를 더 만들 시간에 잘 자고, 전화 한 통을 더 받을 시간에 봄을 만나러 가기로 한다. 오만할 새 없이 무자비하게 살아 숨쉬는 자연스러움으로 회귀하기로 한다.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