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전통적으로 퍼스트레이디는 국민적 사랑을 받아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보다는 영부인의 지지율이 대체로 높게 나온다. 질 바이든 여사 이전에 5명의 퍼스트레이디가 백악관에 있을 때 평균 지지율을 보면 바버라 부시(조지 H. W. 부시 부인) 83.5%, 힐러리 클린턴 52.5%, 로라 부시 (조지 W. 부시 부인) 71.5%, 미셸 오바마 65%, 멜라니아 트럼프 42.5%로 나타났다.
멜라니아는 지난 2021년 1월 백악관을 떠나기 직전에 CNN과 여론조사 기관 SSRS가 실시한 조사에서 42%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는 그 당시까지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에서 가장 낮은 지지율이다. CNN은 “리처드 닉슨부터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임기를 마칠 때 퍼스트레이디의 평균 지지율이 71%를 넘었다”고 전했다. CNN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퍼스트레이디는 거의 예외 없이 존경받는다”면서 “그 자리는 선출직이 아니고, 논쟁을 일으킬 일이 없어 인기가 없을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인들은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에 떨어져도 퍼스트레이디를 후하게 평가했다. CNN에 따르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을 한 닉슨의 부인 팻 닉슨이 백악관을 떠날 때 지지율이 83%에 달했다. 지미 카터는 1979년 8월 당시에 지지율 32%로 국민적 신뢰를 잃었다. 로잘린 카터 여사 지지율은 그 당시에 59%에 달했다.
질 바이든은 어떤가? 뉴스위크 최신 호는 질에 대한 지지율이 그동안 최저치였던 멜라니아보다 더 낮다고 보도했다. CNN 조사에서 바이든 대통령 취임 직후 6개월 동안 질에 대한 지지율은 46%였다. 그 후 집권 1년 반이 지난 뒤에 34%까지 추락했다. 멜라니아는 그 시점에 52%로 질보다 훨씬 높았다.
질에 대한 부정 평가의 원인 중 하나로 그의 과도한 국정 개입이 꼽힌다. 그가 백악관에서 실질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뉴욕타임스(NYT) 백악관 출입 기자가 최근 저서를 통해 밝혔다. 힐러리, 멜라니아, 질 등 역대 영부인 3명을 조명한 책 '아메리칸 우먼'을 펴낸 케이티 로저스 기자는 최근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질에 대해 "그녀는 정말로 바이든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게이트키퍼(gatekeeper)"라고 평했다. 이 기자는 "바이든 대통령의 핵심 측근 그룹에 대한 영향력은 대통령과 질 여사가 서로 비슷하다"고 말했다. 로저스 기자는 “질이 바이든 대통령이 주재하는 대부분의 정치 관련 회의에 참석한다”고 전했다.
질이 ‘바이든 정부 최고 실세’인 데 비해 멜라니아는 백악관에서 ‘그림자 영부인’으로 불렸고, 지금도 대중의 눈을 피하고 있다. 바이든과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 전개 과정에서도 질과 멜라니아는 정반대 행보를 보였다. 질은 아들 헌터 바이든의 총기 소지 위반 등의 재판에 매번 참석해 ‘바이든 가족’의 결속력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려 한다. 멜라니아는 트럼프의 '성 추문 입막음 돈' 의혹과 관련한 형사 재판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질처럼 너무 나서도 싫어하고, 멜라니아처럼 너무 숨어 있어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지지율이 추락하는 진짜 이유로 정치 양극화가 꼽힌다. 서로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대결을 하다 보니 퍼스트레이디들이 타깃이 됐다.
한국에서도 전·현직 대통령과 유력한 야당 대선주자의 배우자들이 연일 도마에 오른다. 그 밑바닥에는 미국처럼 사생결단식 정치 풍토가 깔려 있다. 이제 한·미 양국에서 퍼스트레이디들이 존경받던 시대는 지났다. 이들이 세태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언제든 십자포화를 맞을 수 있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