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경영칼럼] 성숙한 조직과 성찰적 대화

글로벌이코노믹

오피니언

공유
1

[경영칼럼] 성숙한 조직과 성찰적 대화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이미지 확대보기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
경영과 리더십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사상가로 손꼽히는 ‘피터 센게’는 저서 ‘학습하는 조직’에서 조직이 가지는 관리 시스템을 조직의 구성원이 경험한 교육 시스템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책에서 지배적인 교육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서는 지배적인 관리 시스템을 결코 바꾸지 못하며, 알고 보면 둘은 동일한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서문에 있는 이 문장을 보고, 나는 어떤 교육을 받았지? 나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어떤 경험을 했지? 하며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조직에 오면 동일한 교과과정과 비슷한 교육 문화를 경험한 동료를 만나기도 하지만, 또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전혀 다른 교육 시스템을 경험한 이들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많이 언급하는 세대 차이 역시 각 세대에서 경험했던 교육의 차이가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냈던 학교생활만 해도 체벌이 남아있던 걸 생각하면 요즘 학교는 참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은 사고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하니,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부러워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적어도 필자가 아는 선에서 문화나 세대를 막론하고 우리가 경험한 교육 시스템의 공통점이 있진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어쩌면 현재 회사 생활을 함께하는 ‘우리’에 한해서는 공통적으로 ‘대화’를 하는 법에 대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피터 센게는 ‘성숙한 조직’의 조건 중 하나로 성찰적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성숙과 성찰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대화’란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우리는 똑같이 생긴 상형문자를 배우고, 똑같이 발음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 언어를 인지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차이점이 발생한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 예컨대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누군가는 인자하고 좋은 질문을 하던, 머리가 희끗한 스승을 떠올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툭하면 벌을 주고 나에게 고통을 주던 엄격하고 체격이 좋던 담임 선생님을 떠올릴 수도 있다. 누군가는 소질도 관심도 없던 과목에 흥미를 갖게 해준 첫사랑 같은 선생님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렇듯 눈과 귀와 입을 통해 오가는 언어는 우리의 내면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인지된다.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들여다보면, 이 역시 언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언어가 없이는 인지할 수 없고, 인지가 되지 않는 것들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상으로도 떠올릴 수 없다는 점에서 생각 역시 언어를 사용한 일종의 대화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일과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바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관찰’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어린 시절 강낭콩 관찰 일기를 써본 적이 있는가? 관찰은 말 그대로, 나의 사념과 감정이나, 판단과 평가가 들어가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정확하게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마치 둘째 날은 아직 싹이 나지 않았고, 열다섯째 날에 떡잎이 났다는 발견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 발견은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판별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관찰된 데이터를 가지고 고찰을 한다. 바로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다. 왜 나의 강낭콩만 아직 싹이 나지 않는 것일까? 왜 나의 강낭콩만 키가 큰 것일까? 왜 떡잎의 색이 점점 변하는 것일까? '왜'라는 질문은 더 많은 데이터를 찾아 나서게 한다. 다른 친구의 강낭콩과 내 강낭콩이 자라는 조건을 다시 살피게 된다거나, 물을 주는 양이나 횟수, 볕을 쬐게 하는 시간을 달리해볼까 하는 등에 대한 시도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고찰과 관찰을 반복해 나가다 보면 통찰을 얻게 된다. 충분한 데이터가 쌓이며, 내가 관찰이라는 경험을 통해 일관되게 적용되는 진리, 공통적으로 보이는 패턴 등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예지력은 곧 관찰력이다’라는 말처럼, 예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이치를 파악하게 되는 이러한 통찰은 끈질긴 관찰로부터 가능하다. 마치 원주민들이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 것처럼, 통찰을 얻을 때까지 관찰과 고찰을 반복하다 보면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유레카를 외칠 만한 알아차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우리는 통찰력이라고 부르는 생각의 근육을 강화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관찰과 고찰, 통찰에 쓰이는 이 ‘찰(察)’이란 말이 모두 ‘살펴서 알다’라는 뜻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관찰이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행위로서의 찰이라면, 고찰은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에서의 찰이며, 통찰은 이치와 진리를 깨닫는 차원의 찰이다. 그렇다면 성찰은 무엇일까?

성찰은 관찰과 고찰, 통찰의 대상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를 통해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고, 나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를 통해서 그 행동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일과 삶을 관찰함으로써 나의 선택이 미치는 결과에 대한 역학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나 삶의 진리 등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사전은 성찰의 의미를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핀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 나에 대해 이해하고, 나의 삶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는 수용력을 기르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수용력과 알아차림을 갖춘 사람은 외부의 대상과 현상에 대해서도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에서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는지도 모른다.

성숙한 조직은 성숙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하지만 관찰력과 고찰력, 통찰력과 성찰력을 기르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개인의 성숙도의 차이는 천차만별이고, 우리 조직은 각자의 성숙도가 너무 다른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양한 관계상이 생겨나고 크고 작은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공동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성숙한 조직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이미 모인 사람들이 이를 위한 교육을 함께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교육은 개인이 자신 스스로와 성찰적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돕고, 그러한 대화가 또 함께 일하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일과, 우리의 목표에 대해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개인은 관찰하고 고찰하고 통찰을 얻는 방법을 학습하고, 성찰적 사고와 성찰적 대화의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학습은 함께 일하는 관계로도, 일하는 방식과, 성과를 내기 위한 동력으로도 이어지고, 같은 경험을 통해 함께 성숙해 가는 개인들로 구성된 조직이 어떤 모습일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대화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저 ‘질문’만 있으면 된다. 우리의 뇌는 ‘놀이’를 좋아한다. 우리의 뇌는 질문을 받을 때 마치 ‘놀이’를 할 때와 동일한 부분이 자극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반대로 명령이나 부탁을 받을 때에는 그것을 놀이처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즉, 우리의 뇌가 그다지 좋아하는 입력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뇌는 너무 거창하고 불분명한 질문에 대해서는 마치 명령을 받은 것처럼 방어기제를 발동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회사의 비전이 무엇이면 좋겠는가?와 같은 거대한 질문보다는 이미 겪은 일에 대한 소감과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다시 그것을 해본다면 무엇을 다르게 해보고 싶은지와 같은 현실성이 가미된 질문이 더 매력적일 수 있다. 또한 반복된 질문은 뇌를 자극한다. 어떤 정보를 저장하고 꺼낼지를 담당하는 ‘해마’를 학습시키는 것은 결국 반복이다. 거창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떠올리라는 압력보다는, 작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는 것만으로도 뇌는 충분히 창조적인 과정에 착수할 수 있다고 한다. 예,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닫힌 질문은 당연히 뇌가 재미있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경험 자체가 아닌 경험한 사람으로서 경험을 바라보게 하는 질문, 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나를 성장하게 하는 대화. 그러한 경험과 우리의 일과 나의 삶을 연결시키는 질문, 그래서 함께 일하는 우리를 좀 더 이해하게 되는 대화. 질문은 해보지 않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그 너머의 본질적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 성숙이지 않을까. 여러분의 조직에서는 어떤 대화가 오가고 있는가? 함께 일하는 우리가 함께 학습하고, 함께 성숙해 가는 그런 조직은 어떨까? 오늘 당신은 스스로에게, 또 함께하는 이들에게 어떤 질문을 건네고 싶은가?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