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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소요산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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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소요산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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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김유정역이 사람의 이름을 딴 역이라면 소요산역은 산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 역명을 지었다. 1호선 전철을 타고 동두천의 소요산역에 내리면 곧바로 경기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소요산을 오를 수 있다. 소요산의 산세는 그리 웅장하지는 않으나 석영 반암의 대 암맥이 산 능선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경기의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경승지(景勝地)로 유명한 산이다. 동두천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이 이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국사봉을 주봉으로 왕방산·해룡산이 둘러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천보산의 회암령에서 서북으로 칠봉산이 남쪽의 경계를 이루는데 소요산은 국사봉 서쪽 산록에 우뚝 솟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소요산의 명칭 유래는 974년(고려 광종 25년)에 소요산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소요했다 하여 소요산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소요산은 하백운대(440m), 중백운대(510m), 상백운대(559m), 나한대(571m), 의상대(587m), 공주봉(526m)의 여섯 봉우리가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주봉은 상백운대다. 산 정상엔 뾰족뾰족한 기암괴석들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자재암이 있는 백운대를 오르는 계곡은 암봉과 바위 능선 사이로 협곡을 이루고 있어 매우 가파르다. 수도권에 위치하여 전철을 타면 한 시간 내에 닿을 수 있을 만큼 교통편이 좋아 계절을 가리지 않고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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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암 입구 약수터에서 물 한 바가지 마시고 물통을 채우고 백팔번뇌 계단을 올라 석벽과 소나무 걸린 풍경들을 해찰하고 독경 소리 따라가면 자재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덕여왕 시절,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멀리 이곳으로 와서 지은 암자라 한다. 고려 때 이규보가 전국 최고의 찻물이라 극찬하면서 젖샘이라 불렀다는 나한전 앞 석간수로 목을 축이고 잠시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린다.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의상과 더불어 큰 업적을 남긴 원효는 6두품 출신의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토굴에서 목이 말라 잠결에 마신 물이 나중에 깨어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라 크게 깨닫고 그 길로 발길을 돌려 민중 포교에 나섰다. 노래와 춤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도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와 관계를 맺어 파계(破戒)했다. 마흔의 원효가 스무 살의 과부인 요석을 만나 “하늘 받칠 기둥을 깎으려는데 자루 빠진 도끼가 없느냐?” 하니, 요석이 “제가 도끼를 빌려드릴 수 있다” 해서 낳은 아들이 이두(吏讀)를 만든 설총이다. 그러나 14일 만에 싫증을 느끼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며 귀족 불교를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까지 염불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인간 본성으로 돌아가자는 일심(一心), 실제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나는 화쟁(和諍), 모든 집착을 버리는 무애(無碍)가 그의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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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逍遙)란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것을 말하는데, 소요산은 소요를 즐기기엔 너무 가파르고 암릉 구간이 많아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는 산이다. 산행을 시작할 땐 소요유(逍遙遊)를 꿈꾸었으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폭염 중의 산행이라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매미 소리만 요란하다. 산행하며 꽃을 만나길 기대했으나 소요산엔 꽃이 많지 않다. 칼바위 근처에서 보았던 각시원추리, 공주봉을 오르다 만난 돌양지꽃, 누리장나무꽃과 망초꽃과 자주조희풀 정도였다.

하산길에 선녀탕 계곡에 나앉은 피서객들을 보며 굳이 땀 뻘뻘 흘리며 산을 올라야만 산을 즐기는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 마른 목을 축여주던 감로수가 아침에 깨어 보니 해골바가지의 물임을 알고 모두 게워낸 원효의 깨달음까지는 아닐지라도 이 찌는 듯한 더위도 생각하기 나름이 아닐까 싶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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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