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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레거시와 헤어질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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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레거시와 헤어질 결심

플랜비디자인 / 박성우
플랜비디자인 / 박성우
최근 중소·중견 기업들에 대한 HR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폭넓게는 인사제도 전반에 대해 점검하고 새로운 인사제도를 설계해 주는 일을 하기도 하고, 조직의 미션, 비전, 핵심 가치 등과 같이 해당 기업의 지향점이나 일하는 방식을 다시 새롭게 정립해 주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 프로젝트를 의뢰한 기업들의 규모가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창업주에 이어 2세 또는 3세가 경영권을 이어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조직들이라는 것이다. 이 기업들이 HR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동일하게 고민하는 부분은 창업주나 선대 경영자가 구축해 놓은 레거시와 달라진 시대 및 환경 변화에 맞는 새로운 가치체계나 제도 사이에서 어느 정도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지이다.

창업자가 오너인 기업에서 경영권이 후대에게 승계되려면 어쩔 수 없이 리더십이 바뀌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창업주가 경영을 하던 시절과 경영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에 따라 경영철학에 대한 점검과 조정이 필요해진다. 또 내외부 환경 변화와 함께 조직 구성원들도 바뀌기 때문에 인사 철학과 인사제도에 변화가 필요할 수 있다. 또한, 경영권 승계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나 방향성에 따라 새로운 리더십이 세워질 필요가 있다. 리더십이 달라지면 불가피하게 제도와 조직 문화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조직의 근간이 되는 요인들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는 시점이 해당 조직에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기가 되기도 한다.
중소·중견 기업들은 평소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경영철학이나 인사 철학, 조직 문화 등에 신경을 쓰고 예산을 투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경영권 승계라는 방아쇠로 인해 조직 내에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눈에 보이지 않던 이슈들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경영권 승계로 인해 조직이 변화해야 할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그 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일까?

창업주가 오랜 기간 자신의 기업을 성공적으로 성장시켜 왔거나, 최소한 망하지 않고 기업을 유지해온 경우 보통 자기 자신만의 성공 방정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검증해온 일하는 방식이나 조직 문화가 정착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앞서 언급한 다양한 환경 변화로 인해 이런 기존 방정식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하지만 창업주가 경영에 대해 여전히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후세 경영자가 새로운 철학과 제도를 내세우면서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외부 컨설팅 기관을 활용해 새 부대에 새 술을 담기 위한 계획과 전략을 수립하더라도 선대 경영자가 자신의 방식을 내려놓고 새로운 체계와 시스템을 받아들일 용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변화의 노력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주주 등 기업의 경영권과 관련된 이해 당사자가 많지 않은 중소·중견 기업일수록 창업주 또는 오너의 현명한 판단과 시의적절한 의사결정이 중요한 이유다.

시설관리 분야에 종사하는 어느 중견 기업은 창업주가 오너로서 오랜 기간 경영을 이끌어 오다가 충분한 준비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갑자기 경영권을 2세에게 승계하는 사례가 있었다. 하루는 창업주 회장이 어느 특정 사안에 대해 업무 보고를 받고 의사결정을 내린 후 직접 수기로 결재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회장이 갑자기 담당 임원을 불러서 “왜 내 결재도 받지 않고 그 사안을 진행시켰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당황한 담당 임원은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회장이 이전에 수기로 결재했던 문건을 가져와 보여줬다고 한다. 당연히, 자신이 직접 사인한 결재 문서를 본 회장은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창업주 회장은 곧바로 자신의 사임과 은퇴를 결정하고 경영권을 2세에게 넘겨줬다고 한다. 아마 이 조직의 경영진과 후계자는 창업주의 결단이 내려지기 전까지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선대 경영자의 레거시에 갇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경영권 승계라는 쉽지 않은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사전에 준비된 계획과 함께 적절한 시기에 선대의 리더십과 헤어질 결심이 필요하다.


박성우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