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엔 억새와 수크령, 강아지풀과 같은 볏과의 풀들이 가을볕 아래 바람을 타고 있다. 어느샌가 쑥부쟁이도 피었고, 담벼락을 타고 오른 둥근잎유홍초가 허공을 향해 빨간 나팔을 불고 있다. 오래도록 식물들을 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식물들이 우리 인간의 삶에 별다른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상관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화려하게 피는 꽃도 사람을 위해 피지는 않는다. 내가 자신을 예뻐하든 말든, 사랑하든 미워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좀 더 매정하게 말한다면 아예 관심조차 없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식물들은 다만 싹 틔우고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나는 그런 풀이나 나무들을 아무런 부담 없이 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추석날 차례를 지내고 선산으로 성묘 다녀오던 길, 그 길에서 만났던 수많은 들꽃의 이름들을 떠올리면 내 안에서도 가을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고향 집 텃밭에서 익어가던 꽈리 열매와 늙은 오이들, 성묫길에 주워온 한 줌의 알밤이 열매의 계절, 가을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가을볕 한나절이면 벼가 한 섬’이란 말이 있다. 오곡이 익어가는 열매의 계절, 가을엔 햇볕 한 줌이 더없이 소중하기 때문이리라. 꽃이 진 자리마다 가지나 오이, 호박이 맺히는 걸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마술이 따로 없다. 그래서일까. 가을 햇살 아래 벼 이삭이 수런대는 들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한다.
거기에 비하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관성적으로 살아온 나의 삶이 문득 부끄러워진다. 사는 일이 너무 팍팍하다고, 세상에 내보일 열매도 없이 조금만 힘들어도 투정만 늘어놓던 나를 반성하게 된다. 묵묵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은 초록 목숨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단 생각이 든다. 모과 열매에서 달큰한 향기가 나고, 푸른 감이 밀감빛 불을 켤 무렵이면 가을도 병처럼 깊어져 있을 것이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