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는 ‘호타준족(好打俊足)’이란 용어가 있다. 말 그대로 장타 능력과 빠른 발을 가진 선수를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발이 빠른 선수는 타격 능력이 조금 부족하고, 반대로 타격 능력이 뛰어나면 주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50-50 기록은 한 시즌에 홈런 50개 이상을 치고 동시에 도루 50개를 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록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 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역대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타니 이전에 이 기록에 가장 근접했던 선수 자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역대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 가장 많은 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24개 도루에 불과하다. 반대로 50도루를 달성하고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41개 홈런이 지금까지 최고였다. 즉 호타면 준족 능력이 부족하고, 준족이면 호타 능력이 부족한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하지만 오타니 쇼헤이 선수는 두 부분에서 동시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뜻이다.
전 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잘 한다는 선수들이 모여 있는 MLB에서의 오타니 쇼헤이 선수의 전인미답의 원맨쇼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지만 필자는 오히려 마이애미 말린스의 스킵 슈마커(Skip Schumaker) 감독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는 스포츠 정신이 사라진 프로경기에서 진정한 승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1980년생으로 금년 45세인 그는 아직 감독으로서는 젊은 나이이지만 작년에 MLB 내셔널 리그의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약체로 평가되는 마이애미 말린스 팀의 감독을 맡은 첫 해 팀을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킨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날 홈팀 팬들은 팀을 비난하기보다는 MLB 역사상 최초의 대기록을 직접 관람한 사실을 더 즐거워했다. 마이애미 팬들은 오타니 선수가 7회 대기록을 달성하자 ‘커튼골’을 외쳐 오타니 선수가 다시 덕아웃을 나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훈훈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원정 온 선수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선수와 그 감독과 그 팬들의 합작으로 세기의 대기록이 아름답게 달성되었다. 만약 스킵 슈마커 감독이 오타니 선수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합법적인 방법으로 피할 수 있었다. 스킵 슈마커 감독의 당당한 승부는 그 반대의 경우를 살펴보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며 존경할만한 스포츠 정신의 발현인가를 알 수 있다.
KBO에서 제일 팬이 많은 LG 트윈스 팀의 ‘심장’이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영구결번이라는 명예까지 얻는 박용택 현 해설위원에게도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는 사건이 있었다. 야구팬들에게 유명한 소위 ‘졸렬택 사태’는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박용택 선수는 ‘타격왕’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놓고 다른 선수와 시즌 막판까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박 선수의 타율은 0.374이고, 상대 선수는 0.372였다. 고작 0.002 차이로 말 그대로 박빙(薄氷)의 차이였다. 정규리그 순위는 이미 결정 났고 개인 타이틀 경쟁만 남은 9월 25일 박 선수는 상대 선수가 속해있는 팀과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미세한 우위를 굳히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LG 투수들은 상대 선수를 4연타석 볼넷(5타석 1타수 무안타)으로 거르며 그의 타율을 0.371까지 깎았다. 결국 박용택 선수는 최종 타율 0.372로 그해 타격왕이 됐다.
이 사건은 이후 “졸렬한 타율관리”라는 절묘한 문구로 회자되면서 박 선수의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그는 은퇴 전까지 11년을 ‘졸렬택’이라는 오명과 함께 지내야 했다. 본인도 “2009년 이후 제 기사 댓글을 안 읽는다”고 했을 정도로 아픈 별명을 안은 채 박 선수는 절치부심했다. 그 후 박 선수는 성실한 자세로 선수 생활을 한 결과 4번의 골든글러브를 추가했고 한국프로야구 사상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했고, 가장 많은 안타를 친 명예로운 선수로 역사에 남았다. 그 후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후회한다고 고백했고 어리석음을 인정했다. 그는 은퇴식 고별사에서조차 “그 순간 졸렬했을지 몰라도 절대 졸렬한 사람 아니다”라는 사과와 함께 마지막 항변을 남겼고 팬들은 갈채를 보내며 박용택 선수에게 응답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졸렬택'이 아니다.
‘졸렬택’ 사건은 박 선수 혼자 책임을 질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지고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선수가 아니라 그 당시 감독이다. 왜냐하면 상대 선수를 4번이나 연달아 볼넷을 내준 사건은 감독과 투수들이 함께 공모한 사건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야구를 조금 아는 사람들은 투수가 개인적인 판단으로 같은 팀 선수에게 ‘타격왕’ 타이틀을 주기 위해 상대 선수에게 4번이나 연속으로 볼넷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감독의 지시나 혹은 묵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만약 그 경기에서 감독이 투수에게 상대 선수에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라고 지시를 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어리석기까지 하지만, 정면승부를 한 결과 박 선수가 ‘타격왕’이 되었다면 그야말로 선수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팀에게도 자랑스러운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경기 운영 결과 박 선수는 ‘타격왕’이라는 명예는 얻었지만, 오랫동안 ‘졸렬한 선수’라는 오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스포츠의 세계에서는 그만큼 ‘정정당당함’을 귀하게 여긴다.
이 사건과 오타니 쇼헤이 선수와 당당하게 정면 승부를 한 스킵 슈마커 감독의 결단과 투수들의 정정당당함은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귀한 자세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스킵 슈마커 감독은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했다. "1점 차였다면 고의4구를 했을지도 모른다...점수 차가 큰 상황에서 그랬다면 야구 측면에서도, '인과응보' 측면에서도, 또 야구의 신에게 있어서도 부적절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승부를 해야 했다. 야구에 대한 존중을 갖고 경기를 치렀다. 오타니의 홈런은 경기의 일부다. 50개의 홈런을 친 선수다...오타니는 내가 본 선수 가운데 가장 재능이 뛰어난 선수다.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앞으로 몇 년 더 이어간다면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수도 있다. 더그아웃이 아닌 팬으로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봤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운 마음도 있다"며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한 마이애미 팀 선수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승부한 것이 자랑스럽다. 말린스에는 좋지 않은 날이었지만, 야구에는 좋은 날이었다"고 밝혔다. 그에게 ‘꼼수’를 부리는 것은 “야구의 신에게 있어서도 부적절한 결정”이고, 동시에 정면승부를 하는 것은 “야구에 대한 존중”이었다. 오타니 선수의 소속팀인 다저스 팀의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조차 “오늘 경기는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슈마커 감독을 이해한다. 그를 존경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라고 정면승부를 해준 상대팀 감독을 치하했다.
스포츠 정신의 핵심은 무엇보다 ‘공정함’이다. 다시 말하면 규칙을 준수하고 반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상대방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세웠지만 겸손했던 오타니 쇼헤이 선수와 치욕의 기록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한 마이애미 말린스의 스킵 슈마커 감독, 그리고 그런 감독에서 존경심을 표한 승리팀 다저스의 데이브 로버츠 감독, 그리고 이 대기록의 현장을 즐기면서 상대팀 오타니 쇼헤이 선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 팬들이 함께 보여준 스포츠 정신은 혼탁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랜만에 청량감을 만끽하게 해주는 시원한 한 편의 드라마이었다. 하지만 가공의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기에 더욱 감동적인 값진 드라마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