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들이 2025년 인사를 한 달여 앞당겨 실시한 것도 인사를 통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이다. 지난달 말부터 주요 기업 사장단과 임원 인사가 시작됐다. 예년보다 템포가 빠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재계 인사의 키워드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조직 슬림화, 위기 대응 조직 강화, 인재 발탁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번 주 사장단 인사를 마무리할 방침인데, 슬림화에 초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올 초부터 사업 전반의 리밸런싱을 내건 SK의 인사 기조는 ‘조직 슬림화’다.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부회장 4명이 일선에서 물러난 만큼 인사 폭이 크지 않을 거란 관측도 있지만, 사업 재편에 따른 인력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SK는 계열사 임원 수를 최대 20% 줄일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달 말 사장단 인사를 통해 위기 대응 조직을 강화했다. 최근 불거진 복합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연말 인사에서 그룹 차원의 경영진단 기능 부활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2017년 2월 미전실 해체 이후 약 7년 9개월 만에 부활했다는 데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경영진단실은 관계사 경영 진단과 컨설팅 기능을 하는 사장급 조직이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방점을 찍고 트럼프 2기 대응에 적합한 인재를 등용했다. 지난달 15일 현대차그룹은 장재훈 현대차 사장을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대미 통상 대응을 위해 호세 무뇨스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 사장을 외국인 첫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두 사람 모두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 수익성을 끌어올리고 기민한 시장 대응에 나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외교 관료 출신인 성 김 현대차 고문역은 글로벌 경제안보 위기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사장으로 영입했다. 그는 부시·오바마·트럼프·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핵심 요직을 맡아온 국제 정세에 정통한 전문가다.
재계 인사는 이달에도 계속 이어진다. 사장단, 임원, 부장에 이어 팀장급 이하 직원 인사까지 연이어 예정됐다. 매년 이맘때쯤 하는 인사지만 올해처럼 조용한 인사 시즌은 없었다. 주위에 승진하거나 발탁됐다는 좋은 소식보단 조용히 짐을 챙겨서 나갔다는 우울한 소식이 더 많이 들린다.
내년이 더 어렵다고 한다. 현 상황을 유지만 해도 다행이라는 말이 들린다. 인사를 통해 조직을 새롭게 갖춘 대기업들이 내년 불확실성을 뚫고 도약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번 재계 인사가 '망사(亡事)'가 되지 않길 바란다.
유인호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inryu007@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