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은 24절기 중 22번째 절기인 동지(冬至)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팥죽을 먹었다. 정성이 가득 담긴 팥죽 한 사발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딱 비웠다. 동지에 왜 팥죽을 먹을까.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인 동지는 음(陰)의 기운이 극에 달하는 날이다. 우리 선조들은 붉은색을 띤 팥을 태양, 불, 피 같은 생명의 표지로 여겨 음의 기운을 물리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생일날 수수팥떡을 하거나 고사 지낼 때 팥으로 된 떡이나 음식을 하는 이유도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좋은 기운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다.
24절기는 태양력에 의해 자연의 변화를 24등분해 표현한 것이다. 태양의 ‘황경(黃經)’이 270도에 달하는 때를 ‘동지’라고 하는데 동지는 셋으로 구분한다. 동지가 10일 안에 들면 ‘애동지’, 20일 안이면 ‘중동지’, 20일 이후면 ‘노동지’라고 불렀다. 동짓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해 양의 기운이 싹트기 때문에 사실상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예전에는 ‘동지버선’이라 하여 목이 긴 버선을 지어 노인에게 바치기도 했는데 이는 동지부터 해가 조금씩 길어지듯이 노인에게 기운이 돌아오라는 장수(長壽)의 기원이 담긴 선물이었다. 옛사람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여겨 흔히 동지를 '작은 설'이라 하여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다. 그래서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동지에 '동지 팥죽' 쑤어 먹는 것은 오랜 풍속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하여 팥죽을 쑤어 먹는데, 팥죽을 쑬 때 찹쌀로 새알 모양으로 빚은 속에 꿀을 타서 시절 음식으로 먹는다. 또한 팥죽은 제상에도 오르며, 팥죽을 문짝에 뿌려 액운을 제거하기도 한다"는 기록이 있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찹쌀로 단자를 새알만큼씩 만들어서 죽을 쑨다. 이 단자를 '새알심'이라고 하는데, 팥죽에 새알심을 넣어 먹는 것은 염제 신농씨의 자손이란 의미다. 새의 알이든, 곡식의 알이든 알은 생명 탄생의 원천이다. 그래서 동짓날에 죽었던 해가 다시 태어나라는 소생의 의미에서 ‘새알’ 같은 옹심을 넣어 먹었던 것이다.
팥에는 각종 비타민과 칼륨, 식이섬유 등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건강에 좋은 음식이다. 특히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인에게 부족할 수 있는 비타민 B1과 칼륨이 많이 함유돼 있어 피로 해소에도 좋다. 비타민 B1에는 뇌세포를 활성화하는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에 수험생이나 직장인들에게 도움을 준다. 또한 칼륨은 나트륨을 소변으로 배출하는 효능이 있으므로 혈압 관리에도 효과적이다. 팥죽은 연말에 술로 인해 약해진 장을 가진 분들이 먹기에도 충분히 부드러운 음식이다. 동지 팥죽은 단순한 절식(節食)이 아니다. 가족들의 무병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는 아낙네의 소망이 담긴 음식이라 할 수 있다.
동지를 기점으로 낮이 조금씩 길어진다고는 하나 아직 봄은 아득하고 혹한의 겨울은 길기만 하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눈금을 그려 넣고 절기마다 의미를 부여한 옛사람들의 지혜가 놀랍긴 해도 겨울은 여전히 견뎌야 하는 계절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초목도 그러하고, 세상 만물 또한 그러하다. 산책길에서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나 쪼글쪼글 말라가면서도 붉은 등을 켜고 있는 산수유 열매를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수시로 눈보라 치고 매운 북풍에 손끝이 시려와도 봄이 오리라는 믿음, 꽃이 피리라는 희망으로 이 혹한의 계절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팥죽은 굳이 민속적인 의미를 따지지 않더라도 충분히 건강에 좋고 맛도 좋아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건강식이다. 꼭 동지가 아니라도 가족들과 팥죽을 나눠 먹으며 긴 겨울밤,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