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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들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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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들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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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건너가는 몸이 자주 삐걱거린다. 혹한을 견디느라 잔뜩 몸을 움츠리고 지냈던가. 마음이 소란스러우면 몸에 탈이 나게 마련이라는데 내 안이 너무 시끄러웠던가. 머릿속이 어지러울 땐 삶의 자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잠시 떠나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엉킨 생각도 정리하고 바람도 쐴 겸 친구들과 철원을 다녀왔다. 벼가 잘려 나간 논과 황량한 들판 끝으로 흰 눈을 쓰고 있는 원경의 산들이 한 폭의 겨울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적막하고도 쓸쓸한 풍경 속을 꽤 오랫동안 걸었다. 어지러웠던 생각들이 바람의 빗질에 가지런해지고 한결 명료해졌다.

마치 마시멜로를 뿌려놓은 것 같던 흰 비닐로 감싼 볏짚 뭉치들도 사라진 텅 빈 들판 위로 이따금 새들이 내려앉았다 날아오르기를 반복한다. 텅 빈 들판을 불어가는 바람은 거칠 것이 없고, 수시로 방향을 바꾸는 새 떼들의 비행도 한껏 자유롭다. 텅 빈 겨울 들판을 내달리는 바람은 들판의 들숨이고 날숨이다. 칼바람 부는 겨울 들판을 걷다 보면 겨울의 맛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찬 바람과 맞서며 한참을 걷다 보면 원초적 존재감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듯하다. 삶에 한껏 찌들어 남루하던 목숨이 찬 땅바닥에 바짝 붙은 채 겨울바람을 견디고 있는 로제트식물처럼 벅찬 생명감으로 살아난다.

사람은 풍경의 일부일 뿐 겨울 들판의 진정한 주인은 새들이다. 추수할 때 떨어진 낟알 때문에 다양한 새들이 들판으로 날아든다. 들판 끝에서 일군의 새 떼가 날아오르더니 반대편으로 빠르게 날아간다. 기러기 떼다. 저만치 천천히 걷고 있는 재두루미도 몇 마리 눈에 띈다. 모두 먼 곳에서 찾아온 진객이다. 얼핏 보면 무채색의 텅 빈 들판 같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뜨거운 생명감이 있는가 하면 발랄한 생동감도 있는 게 겨울 들판이다. 아무런 구속이나 억압이 없는 겨울 들판은 자유롭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허형만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 일부
시인은 말한다.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이지만 그 빈 들판을 거닐다 보면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것들, 논두렁·밭두렁 사이 눈 녹은 사이로 보이는 키 작은 풀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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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지럽거나 답답할 땐 틈나는 대로 겨울 들판을 거닐어 볼 일이다.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가벼워져 지난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산책을 하면 엔도르핀과 세로토닌이 증가해 기분이 좋아지고, 코르티솔은 낮아져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뇌로 가는 혈류도 개선되어 인지 기능이 활성화돼 자신의 상황을 더 명확히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천천히 걸으며 호흡을 편안하게 하고 주변 경관을 관찰하다 보면 마음속 불안이나 걱정도 사라진다.

틈나는 대로 텅 빈 충만의 겨울 들판을 거닐어 볼 일이다. 무겁고 어둡고 복잡한 마음 다 내려놓고 겨울바람 속을 거닐며 새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위로가 될 것이다. 황량한 들판에서도 먹이를 찾고 자유로이 하늘을 오가는 새들을 보면 찬 바람보다 매운 세상살이에서도 눈송이를 녹이는 따사로운 희망 한 줄기를 발견할 수도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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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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