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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고향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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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고향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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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향하듯 나이 들수록 마음의 풍향계가 자꾸만 고향 쪽으로 향한다. 설중매를 찾아 눈밭을 헤매는 선비처럼 틈만 나면 고향을 찾아간다. 어렸을 적엔 밖으로만 눈길을 주느라 미처 알지 못했던 고향의 비경을 찾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마을마다 품고 있는 숨겨진 이야기들을 알아가는 즐거움도 고향 나들이를 잦게 한다. 꽃을 보기 위해선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지만 내 고향은 한수 이북의 포천이라서 북쪽으로 가야 한다. 아직은 봄이 멀기만 한 2월, 모처럼 하루를 빌려 관인문화마을을 찾았다. 이곳은 포천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자리한 강원도 철원과 경계가 맞닿아 있는 마을이다.

관인문화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밝고 따스한 햇볕이 내려앉는 마을로, 드넓은 논과 밭, 정겨운 모습이 마음에 여유와 편안함을 안겨주는 곳이다. 멀리 후삼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역사 깊은 마을로 ‘관인’이라는 이름은 후삼국시대 궁예의 폭정을 피해 관직을 버린 어진 관리들이 모여 산 마을에서 유래한 지역명이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에는 고지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으로, 황해도 지역 피란민들이 전쟁이 끝난 후 수복지역인 이곳을 정착지로 삼아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일교차가 커서 과일과 쌀이 맛있기로 유명하고, 소를 기르기에 좋은 기후와 환경을 갖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람도 차가운 날, 굳이 관인문화마을을 찾은 것은 이북 5도민의 대표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는 ‘호박만두’를 먹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TV에서 고향 잃은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만들어 먹었다는 호박만두를 소개하던 것이 생각나서 마을 구경도 할 겸 찾아갔던 것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영업을 하지 않는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인기척이 나서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주인이 팔을 다쳐 올겨울은 장사를 접었다고 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기왕에 먼 길 왔으니 마을 구경이라도 하고 가야겠다 싶어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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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농촌이나 그러하듯 이곳도 1980년대부터 고령화와 젊은 세대의 이주로 마을 인구가 줄어들던 중, 2016년 경기문화재단의 ‘경기 북부 문화 재생 사업’이 추진되었다. 관인면 중심상가 현황 파악이 진행되고 2019년에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마을 사업에 선정되어 3년에 걸쳐 관인면 문화 재생 사업이 3년간 추진됐다. 마을 이야기 기록, 이북5도 음식 발굴, 마을 정비 등의 작업이 수행되었고, 특히 2015년 수몰되어 사라진 관인의 명소 ‘해바라기 들녘’을 재현하고자 2022년에 마을 주민들이 직접 나서 꽃을 심고 정성스레 가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관인문화마을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 가게들을 소개하는 간판들과 추억이 그려져 있는 벽화들이다. ‘아트간판뮤지엄’이라는 호칭이 붙을 정도로 마을 곳곳에는 아기자기한 간판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1970년대 영화세트장에 와 있는 듯하다. 담벼락에 그려진 정겨운 벽화들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벽돌 사이로 보이는 민화 느낌의 ‘관인화접도’부터 옛 초가집과 일상을 그려낸 벽화 그리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운영해온 가게 주인들의 초상화가 담긴 간판 등 기발하고 정교한 벽화들이 마을 산책의 재미를 더해준다.

간판 하나마다 마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만 같다. 먹고 싶은 호박만두를 파는 가게 이름이 ‘봄날’이었던가. 아직은 들판을 건너는 바람 소리가 사나운 겨울 끝자락이지만 꽃 피는 봄날이 되면 다시 찾아오리라 다짐하며 집으로 오는 차에 올랐다. 고향이 그립거나 색다른 먹거리를 맛보고 싶다면 포천 관인문화마을로 떠나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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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