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아파트 관리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일본의 경우 대형 맨션도 경리 직원이 상주하거나 전문 전산 회계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반면 우리나라는 공동주택관리법과 정부의 '공동주택회계처리기준'에 따라 매월 엄격한 관리비 정산과 재무제표 작성이 의무화됐다. 여기에 전기료·수도료 등 각종 공과금의 세대별 부과와 납부 대행, 연체료 관리, 전출입 세대 중간 정산까지 관리사무소의 업무 범위는 꾸준히 확장됐다.
이런 특수성은 전 세계 유례없는 아파트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장을 만들어냈다. 현재 전국 2만여 단지, 월 2조5000억원에 이르는 관리비가 이 시스템을 통해 처리되고 있다. 자그마치 연간 32조원에 육박하는 규모다. 국내 인구의 70%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는 단순한 회계 프로그램을 넘어 국가 기간 시스템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시장 형성 초기인 2000년대 초반, 영세한 전산회사들이 각축을 벌이던 이 분야는 대기업 진출로 전환점을 맞았다. 플로피디스크 기반의 단순 회계에서 클라이언트 서버와 웹 기반 시스템으로 진화했고, 인터넷 조회와 자동이체, 카드결제 같은 편의 기능이 더해지며 시장은 급성장했다.
시장은 다시 한번 변화의 기로에 섰다. 우리관리와 NHN의 합작사 엔마스터 출범을 시작으로, 프롭테크 기업 알스퀘어의 '홈닷' 출시 등 새로운 도전자들이 진입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 회계를 넘어 장기수선계획, 전자투표, 모바일 검침 등 다양한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며, 시장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제시하는 혁신의 방향이다. 기존 ERP가 관리사무소 중심의 실무 효율화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로운 서비스들은 입주민 경험을 중심으로 재설계되고 있다. 주차 관제와 커뮤니티 시설 예약, 하이퍼로컬 서비스를 아우르는 통합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여기에 사물인터넷(IoT) 기술과의 접목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스마트홈 기기와 연동된 에너지 관리, 인공지능(AI) 기반의 시설물 예측 정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투명한 관리비 집행 등 기술 혁신은 아파트 관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우리나라 아파트 관리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ERP 시장은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수 있다. 엄격한 제도적 요구사항과 첨단 기술의 결합이 만들어낸 한국형 아파트 관리 모델은 주거 문화의 혁신을 이끄는 새로운 이정표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혁신가들의 도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이상훈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angho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