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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연두와 초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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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연두와 초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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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깊다. 비바람에 꽃잎을 내주고 허룩해진 벚나무 가지를 초록의 잎들이 채우고 있다. 초록은 살찌고 꽃의 붉은색은 야위어 가는 녹비홍수(綠肥紅瘦)의 시절이다. 이즈음의 숲은 이제 막 새잎이 돋기 시작해 연두와 초록이 어우러져 마치 춘몽에 취한 것만 같다. 연두란 제대로 여물지 않은 풋완두콩의 콩꼬투리 속 여리디여린 완두콩이 내는 연한 푸른색을 이르는 말이다. 도종환 시인은 연두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기도 했다.

“초록은 연두가 얼마나 예쁠까?/ 모든 새끼들이 예쁜 크기와 보드라운 솜털과/ 동그란 머리와 반짝이는 눈/ 쉼 없이 재잘대는 부리를 지니고 있듯/ 갓 태어난 연두들도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 어린 새끼들이 부리를 하늘로 향한 채/ 일제히 재잘거리는 소란스러움으로 출렁이는 숲을/ 초록은 눈 떼지 못하고 내려다본다.” -도종환의 시 ‘연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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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서서히 꽃빛을 지우고 연두에서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는 요즘, 새로 피어나는 꽃을 보는 즐거움 못지않게 하루가 다르게 돋아나는 연둣빛 새순과 잎을 지켜보는 일 또한 흥미롭다. 연두에는 첫봄을 맞이한 아가의 눈빛처럼 이제 막 시작하는 생명의 서러움과 두려움이 서려 있고, 가만가만 속삭이는 듯한 수런거림이 남아있다. 그 여린 빛의 연두를 앞세워 지금 숲은 소리 없는 혁명 중이다.

제법 크기를 키운 은행잎이 밝고 환한 빛을 담고 있다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감나무 잎은 울음을 참고 있는 아이의 서러움 같은 게 느껴진다. 제일 먼저 새잎을 내어 단 귀룽나무는 이제는 제법 의젓한 초록으로 짙어져 있고, 천변의 수양버들은 연둣빛 안개에 휩싸여 있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에서 초록으로 산색을 바림질하는 은은하고도 은근한 숲의 변화를 찬찬히 읽어내는 일만으로도 나의 봄은 짧기만 하다.

봄 숲을 보면서 색을 구분하는 것은 부질없다. 숲은 색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저마다 고유한 색을 간직한 초목들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같은 듯 다른 색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산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다고 표현한다. 사전에서 푸른색은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한 색’으로 풀이돼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푸르다’가 ‘풀’에서 온 것으로, 파란색보다는 초록색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한다. 색상표를 놓고 색을 구분하듯 경계도 모호한 숲의 색을 나누기보다는 수목들이 빚어내는 몽환적인 숲의 풍경을 즐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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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죽을 때까지 생장을 멈추지 않는다. 쉬지 않고 세포를 분열시키며 줄기와 가지, 뿌리를 확장하며 해마다 꽃을 피우고 새잎을 낸다. 키를 키우고 새싹을 내는 일은 생장점이, 줄기와 뿌리의 굵기를 늘이는 역할은 부름켜가 한다. 수피와 목질부 사이에 있는 부름켜는 안쪽으로는 물관을, 바깥쪽으로는 체관을 만든다. 이 섬세한 세포층이 나무의 생존과 성장을 책임지는 중심이다. 부름켜가 제 역할을 하기에 생장점은 해마다 키를 키우고 잎을 낼 수 있다. 올봄에 틔운 연두색 잎은 나무가 새로 쓴 일기와 같다.

은은하게 번지는 은방울꽃의 맑은 향기를 찾아 숲을 헤매다가 노거수의 수피를 어루만지면서 나무의 생애를 생각한다. 겨우내 눈보라를 견디어 이 봄에 기어코 다시 꽃 피우고 새잎을 내어 달고 당당히 서 있는 나무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봄 숲에서 고비마다 자주 주저앉던 나의 삶을 생각한다. 우리의 삶도 나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꽃 피는 나무가 늙지 않는 것처럼 꿈꾸는 자는 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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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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