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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달리자-1] ‘이촌동 → 신설동 → 뚝섬 → 과천’ 서울 경마장 이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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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달리자-1] ‘이촌동 → 신설동 → 뚝섬 → 과천’ 서울 경마장 이주의 역사

이촌동 한경변 경마장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 원인
신설동, 근대적 경마장 위영 갖췄으나 한국동란으로 파괴돼
종전 직후 1954년 뚝섬 경마장 개장, 1972년 첫 흑자 기록
86아세안게임‧88올림픽 앞두고 현재의 과천 경마장 체제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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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마사회
지금은 경기도 과천시에 번듯이 자리잡고 있지만, ‘서울’ 경마장은 100년 역사가 열린 대한민국의 근대 초기부터 분주한 이주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25년 조선 전역을 휩쓴 ‘을축년 대홍수’가 첫 번째 이주의 원인이었다.
1921년 가을에 이촌동 한강변의 상설경마장이 개장했다. 기록을 보면, 1922년부터 만 6년간 계속된 한강 시대의 경마장은 말 18두를 수용할 수 있는 마사 1동만 번듯한 건물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가설물에 가까웠다. 관람대만 해도 모래 위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계단식으로 만든 수준이었다.

경주 전에 주로를 트랙터로 정비하는 오늘과 달리, 1923년 한강 경마 때에는 소들이 갈퀴와 빗자루를 끌고 느릿느릿 한 바퀴 돌면서 모래밭을 다듬었다.
한강 경마장이 그런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에 을축냔 대홍수가 발생한 것이었다. 한강 주변 지형까지 바꿔 놓은 그해의 물난리로 인해 경마장 가설물과 콘크리트로 지은 마사까지 흔적 없이 쓸려 내려갔고, 당시 조선경마구락부는 제2의 장소를 급히 물색해야 했다.

자료=한국마사회
자료=한국마사회
새로운 경마장터 찾기는 한국경마 100년 역사에서 최초의 근대적 경마장이 탄생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시대에 어울리는 멀끔한 얼굴로 새로 태어나며 뿌리 내린 곳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였다. 이곳에 부지 약 5만여평을 확보하고 1927년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미나리꽝 천지의 부지에 경마장 건설을 결정하게 된 것은 △수해 걱정이 없다는 지형적인 이점에 △동대문 시가지와 가까운 편리한 교통 여건 △부지 확보의 용이함 때문이었다.

당시 신문과 잡지는 신설동 경마장에 대해 “한반도에서는 물론 일본 어느 경마장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 수준급” 경마장이었다고 묘사했다.

1년간의 공사를 끝내고 1928년 9월 20일 문을 연 신설동 경마장은 1200m 주로와 목조 2층 관람대, 단층 마권발매장, 150두 수용 규모의 마사 5동, 그밖에 사무실과 식당, 그리고 귀빈실을 갖추고 있어 명실상부 고정경마장 시대를 연 최초의 경마장이라 할 수 있었다. 개장 첫 주의 토요일과 일요일부터 경마를 시행한 이래, 대한민국 대표 경마장으로 기능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22년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로 변한 땅 위에서 경마장이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전화(戰火) 속에 신설동 경마장은 산산이 부서졌고, 남은 터마저 미국 공군에 의해 비행장으로 징발돼 더 이상 경마를 시행할 수 없는 처지였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부터 논의가 오고 갔다. 새로운 경마장 부지로는 예로부터 말과 인연이 깊은 ‘뚝섬’이 선정되었다. 조선시대 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있었고 왕실 사냥터로 쓰이기도 했던 이곳을 무대로 1953년 건설공사의 첫 삽을 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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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마사회
건설의 과정은 쓰라리게 고생스러운 세월이었다. 공사 초기부터 농민들과의 마찰로 공방전을 벌이며 정지작업을 진행했다. 또 전쟁통에 빈털터리가 된 마사회로서는 맨주먹 공사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보유한 자산의 상당 부분을 팔아가며 힘겹게 다음 공사를 이어가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경마장 문을 연 건 1954년 5월 8일. 모습을 드러낸 뚝섬 서울경마장은 여기저기에서 급조한 티를 드러냈다. 경주로에는 모래와 풀이 섞여 있었고, 관람대는 미제 맥주 깡통을 이어붙인 허름한 모습이었다. 배당률 계산기도 없어, 경주 20분 전 베팅을 마감하고 수십 명 직원들이 달려들어 주판으로 배당률을 산출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그러나 이처럼 ‘채소밭 한가운데’ 보잘것없는 경마장이긴 해도 역사적 의미는 충분했다. 전쟁으로 중단되어 불과 수십 년 나이테를 끝으로 막을 내릴 수도 있었던 한국경마의 명맥이, 뚝섬 서울경마장의 개장과 함께 3년 11개월 만에 재개되었다.

이후 앙증맞은 조랑말 경주로 겨우 숨구멍만 확보하며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때도 있었다. 민간자본을 유치하고, 경마 발전의 부푼 꿈을 꾸었으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진통을 겪던 시절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72년 뚝섬 경마 사상 최초의 흑자를 기록한 이래, 성장을 거듭하며 영광의 페이지를 썼다.

뚝섬 서울경마장은 이처럼 한국경마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한 유서 깊은 터전이었으나 과천 서울경마장 개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89년 8월 6일 일요일, 이날은 지난 35년여 동안 한국경마의 맥을 이어온 뚝섬 서울경마장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날이었다. 이로써 뚝섬 서울경마장은 대한민국 경마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며, 새로 들어선 과천 서울경마장에 바통을 넘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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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마사회
대형 국제 스포츠 이벤트인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이 과천 시대 개막의 동력이었다. 한국마사회는 경마장 이전을 전제로 한 승마경기장 건설을 정부 측에 건의했고, 이러한 노력은 1983년 2월 25일 발표된 ‘국무총리 제8호 지시’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1984년 봄, 두 대회의 승마경기장이자 과천 시대를 열 새로운 경마장의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인 건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86년 4월 과천 승마경기장 건설공사를 완료했고 1988년 7월에는 시설과 건축물에 대한 추가 공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후 과천 승마경기장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경기장으로서 사명을 완수하고, 1989년 5월 경마장으로의 공식 용도변경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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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한국마사회
과천 서울경마장은 부지 면적만도 뚝섬 서울경마장의 약 4배에 이르렀다. 관람대 역시 기존 협소한 공간에서 3만9700m² 규모로 넓어졌다. 이밖에도 대형 컬러 전광판, 배당률 게시대, 중계 및 방송 설비 등을 설치해 경마 고객들의 관람 환경을 크게 개선했다.

1989년 9월 1일 1000여 명의 경마 관계자와 내외 귀빈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이전을 축하하는 이전 개장 기념식이 개최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마사회는 경마 시스템의 질적 향상을 실현하며 ‘경마’가 대중 레저 문화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다져 나갔다.

<자료=한국마사회 ‘한국 경마 100년사’>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