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경마는 ‘서울’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1922년 조선경마구락부 설립을 기점으로 해방 때까지 경성과 평양, 군산, 대구, 부산, 신의주를 비롯해 청진과 웅기, 함흥 등 9개 경마장에서 전국 순회 경마를 시행했다.
그 많던 지방 경마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본격화된 태평양 전쟁과 그로 인한 경기 하락이 연이은 폐쇄의 원인이었다. 1941년 군산경마장을 시작으로, 전국에 흩어져 계절의 시작을 알리던 경마장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이듬해 급격한 입장 인원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신의주경마장이 춘계경마를 끝으로 문을 닫은데 이어, 웅기경마장은 군마훈련장으로 전용되었다. 1943년에는 함흥과 청진의 경마장도 폐쇄되었다.
1945년 11월 30일 오전 10시 반경, 안방 자리끼가 얼 정도로 춥던 이날 군산 시민들은 지축이 울릴 커다란 사건을 겪는다. 경마장 터에서 보초를 서던 미군 헌병들이 모닥불을 피우다, 다량의 포탄이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경마장 폭발사건 때 순직한 이규철 의용소방대원의 아들 이종남 씨는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소학교 다니던 시절인데, 교실 청소를 하고 있었어요. 거의 다 끝나갈 무렵인데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면서 교사(校舍)가 막 흔들리는 거예요. 유리창이 깨지고 교실 벽에 걸어놓은 게첩물들이 죄다 쏟아져 내렸죠. 칠판이 떨어지면서 애들이 다치기도 했고요.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면서 벌벌 떠는 아이들도 있었고, 어쨌든 ‘모두 엎드리라’는 선생님 말씀에서로 껴안고 뒹굴면서 몸을 피했죠. 그때 창밖으로 보이던 풍경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고개를 들어 내다보니 동쪽 하늘에서 검은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정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어요.”
의용소방대원들을 비롯해 숨진 이만 40명이 넘고 1000여명의 부상자를 낸 폭발사고 이후, 군산경마장 터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개간해 농사를 짓다가 1949년 토지개혁 때 개인소유로 불하된다. 그러나 농사도 잠시. 현재는 부근 논까지 주택단지가 되어 경마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겨우 ‘경마교(競馬橋)’라는 주변 지물의 이름 하나로만 남아, 가슴 아픈 그날의 현장을 홀로 지키고 있을 뿐이다.
불의의 사고를 겪은 군산과는 달리 대구경마장은 해방 이후에도 경마를 시행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경마장 부지가 미군 주둔지로 활용되며 주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반복된 역사의 장난에 시달리면서도 경마 재개의 의지는 끈질겼다.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황폐화된 1640m 주로를 정비하고 가건물 매표소를 세우며, 경주의 열기를 되살리려 했다.
그만큼 대구 사람들의 경마에 대한 열정은 유별났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던 태평양 전쟁 중에도 서울과 부산, 평양과 함께 끝까지 경마의 끈을 놓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전국 경마장들이 차례로 문을 닫던 전시의 와중에도, 대구경마장은 입장 인원과 마권 발매액 실적 등 흥행의 증거가 될 수치들에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처럼 대구 경마는 일본인 마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그들만의 리그’를 넘어, 서민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 든 오락거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 전개된 대구 경마의 부흥 시도는 아쉽게 성공하지 못했다. 1957년부터 2년에 걸친 경마 시행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 인가 획득에 실패하며 세금 체납과부채에 허덕여야 했다. 그러다 1961년 개인에게 부지를 매각하며 30여 년의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부산 경마는 1930년부터 공인 서면경마장 시대를 열었다. 주목할 점은 흔히 ‘서면경마장’이라 불리는 장소는, 실상 3개의 경마장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중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현재 부산시민공원 내에 주로 형태가 뚜렷이 남아있는, 부산 진구 범전동 64-3 소재 ‘제1 서면경마장’이다.
연일 수많은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는 이 경마장 터에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처음엔 일본군 기마부대가 들어섰고,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된 뒤로는 병참경비대가 주둔했다. 또 외국인 포로수용소와 이들을 감시하기 위한 군속교육대가 설치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부산 경마가 터전으로 삼은 곳은 기존 제1 서면경마장 동쪽에 위치해 있던 연지동 130번지 일대 국유지이다. 1946년 이곳을 임대해 임시시설을갖추고 경마를 재개했는데 이곳이 바로 ‘제2 서면경마장’이다.
그러나 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하야리아 부대가 제1, 제2 서면경마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부산 경마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으로 평가되는 ‘제3 서면경마장’이 등장한다.
제3의 장소, 소규모 주로, 급조된 조랑말 경주. 제3 서면경마장을 특징지을 수 있는 키워드들이다. 1956년 봄 하야리아 부대 동쪽 범전동 산 2번지 일대 골짜기를 깎아 길이 360m의 미니 주로를 갖추고, 한국마사회가 주관하는 공식 경마를 열기 시작했다. 재결을 포함한 경마 시행 요원과 기수 7명은 한국마사회에서 파견하고, 현지 기수 3명과 조랑말 70여 마리는 지역에서 조달하는 형태였다.
워낙 열악한 환경에서 급히 준비한 경주이다 보니 어설프고 설익은 모습을 그대로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교가 되지 않아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말들이 많았다. 때문에 마주가 대나무 장대를 가지고 주로에 들어와 기다리다, 자기 말이 다가오면 매질을 하는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흥행 성적만은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평일엔 300~400명에 불과했으나 휴일이면 1,500명을 넘기기도 해 서울을 능가하는 성황을 이룬 때도 있었다.
그러나 부산 경마는 그해 초여름 돌연 중단된다. 기수들이 깡패들의 등쌀에 못 이겨 봇짐을 싸고 철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든 폭력배들이 들끓던 시절이었다. 깡패들이 수시로 찾아와 술을 사라, 승부조작에 가담해라, 무리한 요구를 하며 폭력을 휘두르니 서울에서 내려온 기수들과 경마 시행 요원들은 견딜 도리가 없었다. 이에 철수를 결정했고, 그것으로 부산 경마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꿈처럼 스쳐 지나간 한 계절이었다. 하지만 골짜기를 깎아 주로를 만들었던 부산 사람들의 경마 사랑은 진심이었다. 이 때문인지 불과 1년 남짓 운영된 경마장임에도, 제3 서면경마장 터 주변의 상점과 도로에는 여전히 ‘경마장’이라는 이름이 남아,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자료=한국마사회 ‘한국 경마 100년사’>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