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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달리자-3] 천연기념물 '조랑말' 뛰는 제주 경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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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달리자-3] 천연기념물 '조랑말' 뛰는 제주 경마장

1980년대 들어 제주마 멸종 위기
전통 문화 비키기 위해 경마정 건설
순수 조랑말 찾기 어렵자 ‘한라마’ 출현키도
2023년 순수 제주마 경주 복권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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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마사회
등 뒤로 오름이 보이고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 풍경. 그 아름다운 그림을 배경으로 한라산 서쪽 기슭에 펑퍼짐한 벌판이 눈에 띈다. 그 섬에 가면 경마장이 있다.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금덕리 산 123번지. 20만6000여평 규모 부지에 터를 닦은 제주 경마장이 주인공이다.

1980년대로 들어서며 제주마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내며 이 섬의 사람들과 고락을 같이해 왔으나,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운송 및 경작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 이에 1961년만 해도 1만4000여필이던 제주도 조랑말의 수는 1986년에 이르면 겨우 1500여필에 불과해 겨우 명맥만 잇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랑말의 가치를 대한민국 근대의 초입부터 알아챈 이방인이 있었다.

그 조그마한 말의 등 위에 올라 금강산을 유람한 영국의 여류 탐험가 이사벨라버드 비숍이 주인공으로, 그녀는 한 편의 글을 통해 조선의 조랑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긴다.
“조선의 말은 그 작은 체구에 유럽식 안장을 얹으면 마치 아이에게 저의 아버지 옷이라도 입혀 놓은 것처럼 복대가 축 늘어진다. 한데 놀라운 것은 소인국의 말 같으면서도 그 운동력과 지구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먹이라 해야 기껏 짚단 몇 주먹인데도, 200파운드가 넘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조금도 지침 없이 매일 30마일을 거뜬히 걸어낸다.”

우수하고 기특한 우리 제주마. 결국 이들의 멸종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농림부가 선두에 나섰고, 구체적인 보호 방법 중 하나로 제주 조랑말끼리의 경주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주마가 198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이후 경마장 건설과 시범 경주가 추진된 사정이다.

1987년 10월 첫 삽을 떠 2년 6개월에 걸친 공사를 끝내고 완공에 이르기까지, 제주 경마장 건설사업의 진행과정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경마장 준공 이전인 1987년 7월부터 1989년 10월까지 진행된 시범 경주에선 숱한 코미디가 연출되었다.

기승자세부터 가지가지였다. 장군의 기개라도 과시하듯 꼿꼿이 앉아 말을 모는 기수가 있는가 하면, 말 잔등 위에 넙죽 엎드리는 선진 기승술을 보이는 기수도 있었다. 말도 가관이었다. 달리던 말이 집에 두고 온 무언가 생각났는지 되돌아 달리기도 하고, 어미 말이 경주로를 내달리면 새끼도 따라 뛰며 진기한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원래 경주용으로 사육되지 않은 토종의 제주 조랑말들을 모아 ‘볼만한 경주를 만들기’란 그렇게 어려웠다. 아직 말도, 사람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개장 이후로는 제주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경주 속개를 어렵게 하는 요소였다.

경마장 부지가 해발 400m를 넘다보니 안개가 경마장을 온통 뒤덮고는 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드니 경주가 가능할 리 만무. 안개 때문에 취소되는 경주 수가 한 해에만 30개에서 40개에 달하니, 날씨가 좋을 때 경마를 더 열어 간신히 연간 경주 수를 채워야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순수’ 조랑말을 고르기가 어렵고, 어렵게 고른다해도 제한된 개체 수만으로 정상적인 경주 편성이 힘들다는 점이었다.

당초 한국마사회는 순수한 제주마만 골라 경마를 열기 위해 학계에 연구 용역을 맡겼으나 개장을 앞두고 받아든 건 ‘이미 피가 섞일 대로 섞였다’는 결과였다. 바늘구멍 기준을 통과해낸 진짜 제주 조랑말만으로는 경주 자원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더러브렛과 제주마 사이 잡종인 ‘한라마’가 경주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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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한국마사회
다만 도입 이후에도 제주마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체고를 제한했다. 이후 체고 상한선에 대한 적격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 3개월마다 검사를 실시했고, 기준치를 넘긴 한라마에 대해서는 퇴출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논란이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제주마가 뛰어놀 공간에 한라마를 더 많이 풀어 놓았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켜켜이 소문의 벽이 쌓여 갔다. 상금을 노린 농가가 뚝섬 서울경마장에서 활약하다 은퇴한 수말들을 집중적으로 교배시켜 경주마로 데뷔시킨다는 ‘썰’도 있었고, 한라마의 체고 제한을 맞추기 위해 망아지 시절부터 생명을 유지할 정도만 먹인다는 소문도 있었다.

제주 경마를 둘러싼 날선 비판과 시선들을 더 이상 손놓고 지켜볼 수 없었다.

이에 한국마사회는 2005년에 들어 2020년 이후로는 제주마 혈통경마를 시행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한라마 경주 중단을 예고하게 되었다.

이 결정은 한라마에 생계가 달려 있는 생산농가들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이었다. 이들은 생존권을 주장하며 한라마 경주 연장을 요구했고, 지역 정치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앞장서 대변하며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국회의원을 역임한 K씨의 언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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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마사회
“큰 뜻에 아무리 동의한다 해도 뾰족한 수요대책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지역 농가를 설득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제주마를 육성한다고 우리 한라마 농가를 죽일 수는 없는 거잖아요. 15년에 걸친 장기계획으로 입안한 이유를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한국마사회의 배려도 그 안에 숨어 있었던 거죠. 저 역시 농가의 사정도 들어야 하고, 한국마사회의 입장도 청취해야 하고, 당시엔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2016년 2월 17일 제주 경마 연대기를 통틀어 가장 역사적인 합의문에 서명이 이뤄졌다. 이날 제주도와 한국마사회 그리고 제주마생산자협회와 한라마협회는 제주도청에 모여 최종 합의안을 공식 발표했다. 제주마 경주 전면 시행시점을 당초 2020년에서 2023년으로 미루는 대신, 그 실현을 위해 각 기관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나간다는 내용이었다.

이날의 서명 이후 한라마 경주 비율을 단계적으로 줄여 나갔다. 그 결과 2022년에는 제주마 경주가 85%, 한라마 경주가 15% 비율로 실행되었고, 2023년에는 드디어 100% 제주마 경주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한국마사회는 20여 년의 지루한 논쟁과 갈등을 뒤로하고, 제주 경마장 개장 이래 처음으로 혈통 등록된 제주마로만 경주를 편성하는 ‘순수제주마 경마’의 원년을 열었다.

<자료=한국마사회 ‘한국 경마 100년사’>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