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만해도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공시하면 들썩거렸던 주가가 이제는 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기업들이 그동안 쌓아두었던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목적으로 활용하거나 경영권 매각시 자사주가 많으면 오너가는 엄청난 프리미엄을 챙길 수 있지만 정작 일반 주주들은 아무런 자사주 효과를 얻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투자자들이 수차례 학습효과를 거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2011년 이전에는 자사주 취득을 통해 부당하게 주가를 조작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해 금융 당국이 자사주 매입을 엄격히 규제했다. 자기주식 취득은 원칙적으로 금지됐고 주식소각, 합병 또는 영업전부 양수, 단주처리,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등의 경우에만 허용됐다.
2011년 상법 개정으로 자사주 취득은 기업의 통상적인 재무활동으로 인정됐고 상장회사에 적용되던 자기주식 취득 규정을 비상장회사로까지 확대됐다.
우리나라에서의 자사주 제도는 선진국에 비해 최대주주인 오너가에 훨씬 유리하도록 되어 있다.
자사주는 기업이 기존 주주들에게 현금을 주고 주식을 매입한 것이므로 자사주 취득이 주주환원 정책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배구조 측면에서 자사주가 경영권 방어의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제한됨에 따라 자사주 매입은 의결권을 가진 주식수를 줄임으로써 지배주주 보유 지분의 의결권을 상대적으로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갖고 있다가 지배주주에 대해 우호적인 세력에게 매도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KT는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에 자사주를 맞교환해 의결권을 부활시켰는데 이와 같은 상호주 보유도 지배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
뿐만 아니라 최대주주는 경영권을 매각할 때 자사주를 함께 넘기면서 높은 프리미엄을 챙길 수도 있다.
한샘의 최대주주였던 조창걸 전 명예회장은 2021년 7월 지분 15.45%(363만5180주)를 하임 유한회사에 넘기면서 주당 22만2100원 상당에 매각했습니다. 매각 당시 한샘의 주가는 11만6500원으로 조창걸 전 명예회장과 특수관계인은 90.6%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누렸다.
조창걸 전 명예회장이 높은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는 데는 당시 한샘의 자사주가 지분 26.66%(627만4504주)로 조 전 명예회장의 소유 주식수보다 많았다. 한샘의 자사주는 이제 하임 유한회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맞게 됐다.
한국의 자사주 제도와는 달리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자사주의 활용에 엄격한 규제를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사주는 발행되었지만 유통되지 않으므로 상장기업 시가총액을 계산할 때에도 자사주는 제외하고 유통주식수만 고려하여 산출한다. 이는 기업이 보유 중인 자사주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주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자사주를 처분하는 행위는 개념상 신주의 발행과 동일하게 보고 있다.
국내에서도 자사주 처분을 이사회가 아닌 주주총회에서 동의를 얻도록 하면 일반주주들의 권익이 보호되고 자사주가 경영권 보호 등에 이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사회가 임의대로 자사주를 처분할 수 있어 오너가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사회는 결국 오너가의 의중대로 자사주를 처분하는 거수기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한국에서는 오너가에 유리한 자사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셈이다.
국내에서 자사주의 처분 시 주주총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면 기업들이 자사주를 쌓아두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이용하는 사례가 훨씬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오너가에서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기 위해 주주총회를 개최할 경우 되레 역풍을 맞아 오너가가 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또 기업이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인적분할 할 때 보유 중인 자사주를 자산으로 취급해 분할된 자회사의 자사주를 모회사에 남겨둠으로써 분할과 동시에 의결권이 부활된다. 이른바 ‘자사주의 마법’이다. 이는 모회사가 별도의 지분취득 행위 없이도 자회사의 지분을 확보하게 돼 경영권을 더욱 공고히할 수 있다.
HD현대그룹 등 수많은 그룹들이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자사주의 마법을 통해 지배력을 강화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기업들이 지배주주의 비용이 아니라 배당가능이익을 바탕으로 취득한 자사주를 이용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은 지배주주와 소액주주 간의 이해상충과 대리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증권가에서는 기업들이 자사주를 매입할 경우에는 반드시 의무적으로 소각토록해 자사주가 경영권 방어에 활용되는 것을 원천 봉쇄하고 진정한 주주환원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자사주 소각은 이익잉여금으로 회사 주식을 장내 매수한 뒤 이를 소각하는 것으로 자본금 변화 등은 없고 발행 주식 총수를 줄여 주당순이익을 증가시킨다.
미국 등 선진국 금융당국은 상장회사들이 자사주 매입 이후 소각을 하는 것이 배당보다 주가 부양 및 안정 효과가 큰 주주 환원 정책이라고 권하고 자사주 소각을 적극 활용토록 유도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발표가 주가 상승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자사주 매입 이후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주주들이 명확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자사주 매입이 소각으로 이어진다면 주가의 저평가를 탈피할 수 있고 지배주주의 자사주 남용 가능성을 줄일 수 있으면서 지배구조 개선 효과가 가시화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대성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kimds@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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