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9 10:47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마을 뒤 선산에 올라 성묘를 했다. 내 고향 동리의 옛 이름은 수곡(樹谷), 순 우리말로 나무골이다. 좌우로 순하게 흘러내린 산자락이 삼태기 형국을 이루며 삼십여 호 되는 지붕 낮은 집들을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산마을이다. 문 밖만 나서면 마을의 모든 길이 산자락으로 이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면 성묘 가는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경쾌해진다. 딱히 명절이 아니라도 나는 고향에 내려오면 시간을 쪼개어 마을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르곤 한다. 그때마다 자주 찾는 숲이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누이동생과 함께 심은 이깔나무 숲이다. 그 숲에서 떠올리는2020.01.22 09:44
모처럼 미세먼지도 사라지고 쨍한 하늘이다. 햇살이 설핏 기운 오후, 산책을 나섰다. 옷섶을 파고드는 바람 끝이 제법 맵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이 오래 이어지다 보니 조금만 기온이 내려가도 몸이 부쩍 추위를 탄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방학동의 은행나무가 있는 원당샘 공원까지 걸었다. 원당샘은 연산군묘 가까이에 있는 오래된 샘이다. 예전엔 약수터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으나 요즘은 수질이 좋지 않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내가 원당샘을 찾은 것은 샘물을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다. 원담생 앞에 있는 방학동 은행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바람에 흩어지는 가을날이 가장 화려하지만, 잎2020.01.15 08:29
며칠째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눈길 한 번 걸어보지 못한 채 봄을 맞이해야만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설산의 풍경이 아쉽긴 하지만 숲을 거닐기엔 딱 좋은 날씨다. 집을 나서면 옷섶을 헤집는 찬바람이 성가시긴 해도 조금 걷다 보면 알맞게 몸이 더워져서 숲으로 가는 발걸음이 점점 경쾌해진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산과 만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숲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일상이 권태롭거나 머릿속이 복잡하여 마음에 휴식이 필요해지면 곧잘 숲을 찾아 집을 나선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면 무료하던 일상이 다시 반짝이2020.01.08 12:43
숲으로 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다. 지난여름 이사를 한 뒤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 너머로 도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산을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도 자주 숲을 찾지 못했다. 눈길 닿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물리적으로는 가까이에 있으나 숲은 늘 마음 밖에 머물러 멀리 있었던 셈이다. 겨울엔 꽃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숲으로 가는 길에 스스로 마음에 바리케이드를 쳤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숲엔 꽃이 아니라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마음을 사로잡을 매혹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나의 소박한 새해 소망 중의 하나는 자주 숲을 찾아 숲과 좀 더 가까이 지2020.01.01 09:52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새로 선물 받은 삼백예순다섯 날에 저마다의 꿈과 희망을 담아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이 어떠하든 새해에는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2년여에 걸쳐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꽃들을 소개하는 동안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고 많이 행복했다. 내가 소개한 꽃을 보고 어떤 이는 그동안 무심했던 야생화에 부쩍 관심을 두기 시작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초록별 지구를 지켜온 그 중심에 꽃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자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여기에 소개되는 꽃들을 보는 동안만이라도 팍팍하던 마음이 촉촉해지고 향기로워졌다면 그2019.12.25 10:21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세모의 끝에 서면 늘 보람된 일보다는 후회되는 일이 더 많다.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했으나 돌아보면 아쉬움이 크다. 그런데도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한 해였다. 일주일에 한 편씩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꽃들을 소개한 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숲 해설가 국가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다. 숲 해설가는 꽃만이 아니라 숲의 모든 것을 소개하고 사람들을 숲으로 안내하는 사람이니 내게 딱 어울리는 일이기도하다. 숲 해설가에게 꽃이 사라진 겨울은 눈이 없는 크리스마스와 같다. 하지만 꽃을 볼 수 없는 것은 안타깝지만 숲에 관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며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엔 더2019.12.18 13:11
꽃이 사라진 겨울은 삭막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거리엔 찬바람만 쌩쌩 불어간다. 다행히 올겨울은 아직 극심한 추위는 없었다. 하지만 언제 한파가 몰아칠지 모르는 한겨울 속이라 어서 빨리 따뜻한 봄이 왔으면 싶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듯이 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꽃 피는 봄이 가까워진다고 믿고 기다리기엔 겨울이 너무 길다. 며칠 후면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서는 동지(冬至)다. 요즘은 난방도 잘 되는 집과 오리털 점퍼도 있으니 혹한의 추위가 닥친다 해도 그다지 걱정할 일은 못 된다. 오히려 겨울 추위보다 더 매서운 세상의 한파에 꽁꽁 얼어붙은 마음속의 한기를 몰아낼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은 아2019.12.11 13:02
명이나물 장아찌가 택배로 왔다. 몇 해 전, 울릉도에서 여름을 보낼 때 내가 묵었던 울릉콘도에서 보내온 것이다. 명이나물 장아찌가 담긴 택배상자를 풀다가 고두현 시인의 ‘늦게 온 소포’ 한 구절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비록 어머님의 겨울 안부는 아닐지라도 한때의 인연을 잊지 않고 꽁꽁 싸매 보내온 귀한 명이나물 장아찌를 받고 보니 고마운 마음에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명이나물의 본래의 이름은 산마늘이다. 백합과에 속하는2019.12.04 10:41
마침내 12월이다. 비 한 번 다녀간 뒤 빙점 아래로 곤두박질친 수은주만큼이나 마음도 덩달아 얼어붙는 느낌이다. 오·헨리의 명작 '마지막 잎새'가 생각나며 이 추운 계절을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궁리가 많아진다. 며칠 전 거여동의 한 작은 도서관에서 '꽃을 보고 걸으면 가시밭길도 꽃길이 된다'는 제목으로 인문학 강의를 했다. 감각기관 중에서 우리는 시각을 통해 가장 많은 정보를 얻고 세상을 이해한다. '눈길 가는 곳으로 마음이 간다'는 말처럼 시선이 닿는 곳에 마음이 머문다.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떤 이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고 어떤 사람은 희망의 빛을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꽃들이 모두 사라진 겨울이 되2019.11.27 12:50
지하철역 계단에 올라서는데 와락 달려드는 바람 끝이 제법 매웠다. 성긴 옷섶을 여미며 약속장소로 걸음을 서두르다가 가로변 화단에서 보라색 꽃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다름 아닌 해국이다. 추운 겨울이 바로 코앞인데 이렇게 뒤늦게야 꽃을 피우다니! 반가움과 안쓰러움이 교차하며 마음 안섶이 마른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렸다. 남쪽의 바닷가나 울릉도나 제주도 같은 섬의 절벽에서 볼 수 있는 꽃인데 도심의 화단에서 마주치고 보니 약간 생뚱맞고 어색하긴 해도 반갑기 그지없다. 해국(海菊)은 이름처럼 바닷가에 피는 야생국화다. 가을 산야에 흐드러지던 산국,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와 같은 국화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찬바람 매2019.11.20 10:32
거리는 온통 낙엽의 물결이다. 가을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던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밤새 몸살이라도 앓은 듯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소공원의 벚나무들은 바람도 없는 허공으로 물든 이파리를 함부로 뿌려대며 몸을 비우는 중이다. 서둘러 잎을 내려놓은 채 고요히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운문선사의 '체로금풍(體露金風)'이란 법문이 부록처럼 따라온다. 가을바람에 잎이 진 뒤에야 나무의 본체가 완연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른 봄부터 어여쁜 꽃만 탐하던 나를 번쩍 정신 차리게 하는 장군죽비 같은 말씀이기도 하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휴일 저녁, 경기도 포천의 '하늘아래 치유의 숲'에서 찍은 사진들2019.11.13 12:13
나름 꽃을 찾아 전국을 떠돌며 오랜 시간 자연과 함께 해왔다고 자부했던 것이 오만이었을까. 올가을 단풍 구경은 제대로 때를 맞추지 못해 속절없이 끝나버렸다. 내장산에 갔을 땐 너무 일러 채 단풍이 들지 않았고, 주왕산을 찾았을 땐 너무 늦어 절정을 지나 이미 낙엽이 지는 중이었다. 자연의 때를 알아차리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다. 노랗게 물든 이파리를 함부로 뿌려대던 은행나무들이 며칠 새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을 보니 곧 겨울이 들이닥친 모양이다. 비록 절정의 단풍은 보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희귀수목인 망개나무를 직접 보고, 주왕산의 깃대종인 바위 암벽에 붙어사는 둥근잎꿩2019.11.06 13:03
숲을 사랑하는 지인들과 정읍으로 가을여행을 다녀왔다. 구절초 축제와 옥정호의 물안개, 그리고 내장산 단풍까지 살뜰히 즐겨볼 요량이었지만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구절초행사장은 너무 늦게 찾아간 듯 게으른 꽃 몇 송이만 남아 있었고, 내장산 단풍은 너무 일찍 찾은 듯 청단풍만 청청하여 일찍 물든 성질 급한 단풍나무 아래서 겨우 인증샷만 남겼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한 장면과도 같은 옥정호의 새벽 물안개를 맘껏 즐긴 것이었다. 비록 시절인연이 닿지 않아 바라던 대로 모든 것을 얻지 못한 여행이었지만 위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일이 절대 간단치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점차 산빛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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