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7 09:09
산수유가 피었다. 폭설이 내리기 며칠 전이었다. 아파트 화단의 나무들 가지치기할 때 한 가지 주워다 물병에 꽂아두었던 것인데 거짓말처럼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올해는 입춘이 지난 뒤에도 봄눈답지 않게 폭설이 자주 내린다. 진즉에 남녘에서 올라오는 꽃 소식에 마음이 들떠 자주 가지 끝으로 눈길을 주곤 했는데, 산수유나무는 그때마다 번번이 하얗게 눈꽃을 피워 나의 기대를 저버리기 일쑤였다. 몇 번이나 더 눈꽃을 피워야 가지 끝에 꽃을 피우려나 조바심을 하던 터라 꽃봉오리 부풀 틈도 없이 전기톱에 무참히 잘려 나간 가지가 몹시 안쓰러웠다. 혹시나 하고 물병에 꽂아두고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눈부신 꽃을 피운 것2024.02.20 09:45
어느덧 1년 중 가장 짧은 달인 2월도 저물어 간다. 여전히 창밖엔 달빛이 눈 속에 차고 옷섶을 헤집는 바람 끝이 매운 시절이지만 2월은 새로운 계절을 향해 건너가는 징검다리처럼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낙엽 내음이 그리워 숲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청미래 열매처럼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소망이 빨갛게 불을 밝히는 입춘과 우수가 들어 있는 달, 2월은 봄을 갈망하지만 흰 눈과 시린 달빛, 겨우내 우리를 성가시게 하던 북풍과 폭설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봄빛이지만 겨우내 눈 속에서도 붉은빛을 잃지 않은 청미래 열매처럼 우리가 가슴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머지않2024.02.13 14:39
남녘에서 올라오는 꽃 소식은 제쳐두더라도 요 며칠간 몸에 걸친 외투가 부담스러울 만큼 기온도 올라서 곧 봄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겨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저녁 무렵 눈발이 날리는가 싶더니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세상은 다시 흰 눈 속에 파묻혀 있다. 도로 위의 눈은 곧 사라졌지만 멀리 흰 눈을 뒤집어쓴 북한산은 한 폭의 빼어난 수묵화처럼 매혹적이라서 쉽게 눈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움은 손 닿지 않는 거리에서 피어난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그리움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눈 덮인 북한산을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산행을 감행한 이유도 그 그리움의 거리를 메우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아침 일찍2024.02.05 14:44
입춘(立春)이다. 24절기 중 첫 절기인 입춘의 입은 들 입(入)자가 아닌 설 립(立) 자를 쓴다. 굳이 그 까닭을 나름대로 부연하자면 입춘은 겨울에서 봄이라는 계절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인간도 마음속에 봄을 일으켜 세우는 때라는 의미가 담긴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혹시나 어딘가 와 있을지도 모를 봄기운을 찾아 숲길을 걷는다. 숲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백목련의 꽃눈이 오늘따라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며 눈을 찔러온다. 입춘이 되기도 전에 홍릉 숲에는 복수초가 피었다는 뉴스를 본 게 며칠 전이었는데 도봉의 숲은 여전히 겨울빛을 간직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얼음 풀린 계곡의 여린 물소리마저 없다면 그야말로 적2024.01.30 12:51
바람이 맵차다. 한 차례 혹한이 지나간 뒤여서 엔간한 추위쯤은 거뜬히 이겨낼 만도 한데 뺨을 스치는 바람이 아직은 겨울임을 일깨워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볕 바른 담벼락 아래 서면 햇살의 온기가 느껴져 어딘가에 꼭 봄이 와 있을 것만 같아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계절은 마디가 없는 것이라서, 그 경계 또한 명확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겨울 속에 봄이 있기도 하고, 봄 속에도 겨울이 남아 있기도 하다. 날씨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 또한 계절을 체감하는 정도도 천차만별이다. 혹한의 겨울을 견디는 힘은 봄이 오리라는 믿음이다. 옛사람들은 ‘구구세한도’를 그리며 추위를 견디고 봄을 기다렸듯이 맵찬 북풍을 뚫고 우리2024.01.23 14:58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무심코 바라본 북한산. 간밤에 눈발이 스친 듯 희끗희끗한 눈을 이고 선 북한산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와 흡사하다. 저리 빼어난 자태와 위용을 자랑하는 명산을 문밖만 나서면 늘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세월이 흐를수록 절감하게 된다. 세월처럼 빠르고 무심한 것도 없다. 나무에 핀 상고대를 보기 위해 북한산을 올랐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올해도 겨울 산행을 하리라 마음을 다졌지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그저 바라만 보다가 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해가 바뀌면서 부쩍 고향 나들이가 잦아졌다. 고향이 수백 년2024.01.16 14:21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 세월이란 돌아보면 흐뭇하고 기쁜 일보다는 늘 아쉽고 후회가 더 많은 법이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니 지난 시간에 연연하는 것은 부질없다.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라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미 지나간 날들은 잊어버리고 새로 받아 든 삼백예순다섯 날을 값지게 보낼 수 있도록 새로운 소망을 담아 알찬 계획을 세워볼 일이다. 비록 다 이룰 수 없다 해도 한 해의 계획을 세우는 일은 중요하다. 한 해를 잘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계획이 필요하다. 마치 집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있어야 하고, 새로운 길을 떠나기 위해선 지도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2023.12.25 13:38
동지 팥죽을 먹었다. 11월 초순에 동지가 들면 애동지라 해서 팥죽을 먹지 않았다면서도 기어이 팥죽을 쑤어 밥상 위에 올린 것은 사랑이요, 정성이다. 귀찮음을 뒤로 하고 팥을 불리고 죽을 끓인 그 마음을 알기에 북극한파가 몰아친 추운 날씨에도 팥죽 한 그릇 비우고 나니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동짓날이면 어김없이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리며 가족의 무탈을 빌던 어머니가 새삼 그립다. 팥의 붉은 기운이 액운을 물리치고 전염병을 예방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팥죽의 주원료인 팥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따라서 팥죽은 추운 겨울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영양도 풍부해서 건강식으로도 좋다. 어머니는2023.12.19 13:11
산행을 떠나는 날, 기다리는 눈 대신 아침부터 찬비가 뿌렸다. 우이령 옛길은 트레킹하기엔 더없이 좋은 길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은 걸어야지 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사전 예약하는 게 귀찮아 매번 뒤로 미뤄두었던 길이다. 다행히 숲 모임에서 12월 행선지를 이곳으로 정한 덕분에 해를 넘기지 않고 우이령 옛길을 걸을 수 있었다. 비 오는데 무슨 산행이냐는 지청구를 들으며 집을 나섰지만 다행히 비는 우산을 펼치기도 애매할 만큼 흩뿌렸고, 비에 젖은 숲 내음이 한결 발걸음을 경쾌하게 해주었다. 우이령 옛길은 서울 우이동과 경기도 양주를 가장 단거리에 연결하는 길로 총 6.8㎞에 이른다. 경기도 교현리 방향이 3.7㎞, 우이2023.12.12 14:31
마침내 12월이 되었다. 한 해의 끝자락, 12월로 접어들면서 기온은 확연히 낮아진 듯하다. 석양에 기운 햇살을 받은 나무들이 그림자를 한껏 늘여 놓는 저녁 무렵이 되면 뺨을 스치는 바람 끝이 제법 맵다. 장갑을 끼지 않고 자전거를 타면 찬 바람에 손가락이 아려올 정도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을 갈망하게 되는 것처럼 기온이 떨어질수록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 한 줌이 아쉽기만 하다. 올가을은 너무 짧았다. 아쉬운 대로 북한산에서 단풍 구경을 하긴 했으나 올해는 단풍이 예쁘게 들지 않았다. 이상기온으로 늦더위가 오래 지속되다가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나무들은 미처 단풍 들 틈도 없이 된서리를 맞았다. 푸른 잎이 물들기도2023.11.28 13:23
인왕산을 올랐다. 요 며칠, 냉랭해진 외기에 지레 겁을 먹고 채비를 단단히 하고 집을 나섰는데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마저 없어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등짝에 땀이 배어 나왔다. 독립문에서 출발하여 안산 자락길을 따라 걷다가 무악재 하늘다리를 건너 인왕산(338.2m)을 올랐다. 인왕산이란 지명은 이 산에 있는 인왕사란 절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불가에서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산이라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아 다양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하늘다리를 건너 제일 먼저 마주치는 바위는 해골바위다. 누가 이름을 일러주지 않아도 형상만 보면 그 이름을 너끈히 짐작할 만2023.11.20 12:01
바닷바람이 제법 차다. 가을도 막바지인 11월은 햇빛이 정수리를 쪼아대는 한낮을 제외하면 바람 끝이 서릿발처럼 맵고 차다. 신두리 해안사구를 찾은 것은 근 20여 년 만이다. 스무 해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와는 풍경이 많이 달라져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빼곡히 들어찬 펜션 촌과 새로 세워진 사구센터, 그리고 아기자기한 조형물과 사구 탐방로에 설치된 나무데크까지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단 하나, 변하였으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는 것은 세찬 바닷바람과 그 바람이 세월을 두고 날라 쌓아 올린 모래 언덕이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세계 최대의 모래 언덕이자 슬로시티로 지정된 태안의 가장 독특한 생2023.11.16 13:43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 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 나희덕의 시 ‘찬비 내리고’ 일부 찬비 내리고 화려한 색의 향연이 끝난 거리는 관객이 떠난 야외공연장 모습처럼 한껏 어수선하다. 쓰레기를 치우듯 미화원들이 부지런히 낙엽을 쓸고, 도로변엔 낙엽을 담아 놓은 자루들이 즐비하다. 숲에 지는 낙엽과 달리 도심의 낙엽들은 바닥으로 내려앉는 순간 숱한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으스러져 미화원들을 힘들게 하는 한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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