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4 10:29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 지났다. 창밖에는 아직도 가을이 상영 중이지만 가을이라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도 전에 머지않아 눈은 내려 온통 세상을 하얗게 덮을 것이다. 이미 설악산엔 눈이 내려 쌓이고 서울에도 첫눈이 흩뿌렸지만 나는 아직도 아이처럼 첫눈을 기다리는 중이다. 어느 시인이 “경지 정리가 잘 된 수백만 평 평야를/ 흰 눈이 표백하여 한 장 깨끗한 원고지를 만들어 놓았다”고 표현했듯이 눈이 내려 쌓여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추함을 모두 지워 만든 순백의 원고지 빈칸에 설레는 마음으로 나의 문장을 적어 넣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은 아름답지만 너무 짧다. 갈수록 가을은 짧아져서 오는2021.11.17 09:29
일찍 찾아든 추위에 몸보다 먼저 마음이 움츠러드는 요즘이다. 활엽수들은 곱게 물든 이파리를 자랑할 틈도 없이 찬바람에 서둘러 잎을 내려놓는다. 찬란한 새봄을 맞이하기 위한 나무들의 겨울 준비는 남김없이 비우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낙엽귀근(落葉歸根). 잎은 떨어져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 자신에게 생명을 준 흙에 보답이라도 하듯 나무는 곱게 물든 이파리들을 모두 떨구어 대지를 덮어주고 알몸으로 찬바람을 견디며 겨울을 나는 것이다. 찬바람에 손끝이 시려오는 아침 산책길에서 민들레를 만났다. 바람 없어도 우수수 잎이 지고, 꽃보다는 열매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겨울 들머리에서 민들레꽃을 보다니! 추위에2021.11.10 14:23
지난 8일은 입동(立冬)이었다. 30년 만에 가장 따뜻한 입동이라는 뉴스처럼 절기가 무색하게 한낮의 기온이 20도 이상 올라가 마지막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계절은 오라고 손짓한다고 오고, 오지 말라고 손사래 친다고 해서 오지 않는 법이 없다. 인간이 오랜 세월을 두고 경험과 지혜로 만든 절기는 어김없이 시간의 눈금을 정확하게 짚어 낸다. 따뜻했던 어제와 달리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비를 맞은 나무들이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연신 잎을 떨구고, 바닥에 내려앉은 낙엽들은 서로 몸을 포갠 채 내리는 찬비를 맞고 있다. 이 비 그치고 나면 곧 겨울이 들이닥칠 것이다. 며칠 전2021.11.03 10:20
가을 산의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어느 해 가을이던가.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 가는 가을 산을 바라보며 꽃상여를 닮았단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단풍 든 가을 산이 마치 한 생을 마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망자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꽃상여처럼 화려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을 들머리에 찾아왔던 첫 추위도 가을볕에 스러지고 눈길 닿는 곳마다 곱게 물든 나뭇잎들이 나를 향해 손짓하건만 변변한 단풍 나들이도 못한 채 11월을 맞았다. 묵은 달력을 떼어내며 “세월이여/발자국을 먼저 찍어 놓다니!”라고 탄식한 함민복 시인의 ‘달력’이란 시를 입속에 넣고 웅얼거려 본다. 굳이 먼 길을 떠나지2021.10.27 10:24
때아닌 한파주의보에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겨울옷을 꺼내 입어도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여름을 건너온 나무들이 물들기도 전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추위에 푸른 잎을 떨구는 나무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엷어진 가을 햇볕을 쬐며 조금씩 가을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나는 아침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느티나무와 대왕참나무의 변화를 살피며 곧 지나가 버릴 것만 같은 가을을 마주한다. 여름내 초록 그늘을 드리우던 느티나무는 햇살을 빌려 수천수만의 이파리들을 점차 밝은 노랑으로 물들이고, 산책로에 줄지어 선 대왕참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빨갛게 불타오르는 중이다. 흔히 사람들은 가을을 두고2021.10.20 09:57
춥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일요일, 서울의 아침 공기는 ‘춥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싸늘하기만 했다. 갑작스레 빙점 아래로 키를 낮춘 수은주처럼 덩달아 위축된 몸과 마음을 다독 여 거리로 나섰다. 아직 단풍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 정도의 추위에 지레 겁을 먹고 집안에서 금쪽같은 휴일을 허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기는 행인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게 두터워졌다. 더러는 패딩 점퍼 같은 겨울옷을 입은 사람도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가로수나 소공원의 나무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묵묵히 찬바람을 맞고 서 있다. 길가의 꽃들이 간밤의 추위 때문인지 한결 소슬해 보인다. 꽃잎들은 추레해졌고2021.09.29 09:20
창을 열 때마다 바라보이는 도봉산이 나를 유혹한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봐도 좋은 풍경이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좋아 쪽빛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자운봉의 흰 이마가 한층 가까이 느껴지면 불쑥 산을 오르고 싶어진다. 딱히 정상에 오르지 않더라도 그 숲에 들어 온몸으로 가을을 느끼고 싶어진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아침 일찍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섰다. 꽃을 보는 일이 그렇듯이 망설이다가 지금을 그냥 흘려보내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이란 걸 알기에 조급해진 마음이 내 등을 떠민 것이다. 가로변의 벚나무엔 벌써 하나 둘 물든 이파리가 눈에 띄고 은행나무 아래를 지날 땐 떨어진 열매들이 행인들의 발길2021.09.15 09:06
아침 일찍 고향으로 향했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기 위해서다. 한해살이풀들이 마르기 시작한다는 처서 무렵이면 늘 하곤 했는데 올해는 좀 늦었다. 고향집 헛간에서 녹슬어 가던 예초기를 꺼내어 손을 보고 낫과 갈퀴 등을 챙겨 선산을 올랐다. 어느새 길가엔 낭창거리는 코스모스가 산들바람을 타고 한껏 높아진 쪽빛 하늘엔 흰 뭉게구름이 목화송이처럼 피어 있다. 초록들판엔 벼 이삭들이 수런거리며 익어가고 인적 없는 논두렁을 한가로이 거닐던 백로 한 마리 건너편 솔숲으로 느리게 날아가는 모습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선산을 오르는 길섶엔 연보랏빛 쑥부쟁이, 꽃 며느리밥풀, 진홍빛 물봉선, 나도송이풀꽃, 이질풀, 고마리,2021.09.08 08:43
하루가 다르게 높아만 가는 파란 하늘과 자주 일었다 스러지는 구름을 보며 가을을 느낀다. 마스크를 쓰고 두 번째 맞는 가을이다. 누군가는 낙엽 한 장에서 가을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했지만 나는 날마다 한 뼘씩 키를 높이는 하늘을 보며 가을이 당도했음을 절감한다. 딱히 하늘이 아니더라도 문밖만 나서면 가을의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산들바람 부는 천변을 달리거나 잠시 짬을 내어 단풍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는 산책로만 걸어도 어렵지 않게 가을을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은 아무 말이 없어도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며 만물은 저절로 생장하여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다. 얼마 전에 썼던 꼬2021.09.01 08:44
영월로 길을 잡고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비가 내렸다. 차창을 타고 빗물이 눈물처럼 흘러 내렸다. 여름내 코로나19로 발이 묶여 있다가 백신 2차 접종을 마친 뒤에 잠시나마 어디론가 떠나 지친 심신을 치유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을 때 문득 떠오른 곳이 영월 청령포였다. 그곳의 지명을 떠올리는 순간 부록처럼 따라온 한 그루의 소나무 생각이 간절해졌다. 다름 아닌 청령포의 관음송(觀音松)이다. 조선 왕조 오백 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임금이었던 어린 단종의 유배지에서의 고독한 일상과 울음소리를 묵묵히 지켜보며 위로해 주었다는 바로 그 소나무이다.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노거수는 그 자체로도 경외의 대상이2021.08.25 13:16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간송 전형필 가옥이 있다. 이 집엔 일제로부터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쓰고 일생을 바쳤던 그의 체취가 남아 있다. 북한산 둘레길로 이어지는 등산로 입구에 자리하여 숲을 찾을 때마다 지나치는 곳이기도 하다.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난 간 뒤, 가벼운 산책을 할 요량으로 전형필 가옥까지 걸었다. 담장 너머로 붉은 배롱나무 꽃이 눈부신 초등학교를 지나고, 능소화가 운치 있게 피어있는 아파트 후문을 지났다. 2차선 자동차 도로를 건너 푸른 감들이 떨어져 있는 골목을 지나 그곳에 도착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입구의 철제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둘러본 곳이라 서운할 리도 없는데2021.08.18 10:48
고추잠자리가 날고 있다. 어디서 왔을까. 창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교 담장 곁에 서 있는 가죽나무 우듬지 위로 무리 지어 날고, 멀리 보이는 도봉산의 암봉 뒤로는 끝없이 흰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파란 하늘의 빈틈을 메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가을을 예감한다. 그러고 보니 입추가 지난 뒤에도 지칠 줄 모르고 그악스럽게 울어대며 밤잠을 설치게 하던 매미소리도 어느 결엔가 잦아들었다. 저녁나절 천변을 걸으면 맹위를 떨치던 폭염도 사라졌는지 불어오는 바람결엔 서늘한 기운이 스며있어 가을을 예감하게 한다. 코로나로 인해 변변한 나들이 한 번 못해 보고 지낸 여름이라서 은연중에 빨리 가을이 오길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는지2021.08.11 09:31
과연 이 여름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무덥고 지루하기만 한 올 여름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지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지루한 여름을 나는데 독서만 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중에도 시집을 가까이 두고 글을 쓰다가 막히거나, 심심하고 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서 시를 읽고,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을 때 시를 읽는다고 했다. 내가 시를 읽는 이유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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