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먹을거리에 대한, 좋고 바른/생각과 태도(good and right/thinking and attitude), 즉 음식윤리가 꼭 필요한 이유이고, 음식윤리의 기본 마인드를 ‘인간중심주의’에서 ‘비인간중심주의’로 근원적으로 바꾸어야 할 이유다.
비인간중심주의는 생태계의 각 개체를 중시하는 개체론과 생태계를 유기적인 전체로 파악하는 전체론으로 나눌 수 있다. 개체론은 동물에게만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동물중심주의(감각중심주의)와, 모든 생명체에게도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생물중심주의(생명중심주의)로 나눌 수 있다. 반면에 전체론은 생명체는 물론 생명이 없는 생태계의 무생물도 내재적 가치가 있다고 보며, 대표적인 예로 대지윤리를 들 수 있다.
개체론의 입장에서 볼 때 새를 존중하고 새와 공존하려는 생각과 태도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전체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생태계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새의 삶에 개입하여 생태계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뿐만 아니라 새에게 먹이까지 준다면 더욱 그러하겠지.
그래서 과감히 물 접시를 치워버렸다. 물 접시를 치운 뒤 단골손님처럼 오던 새 한 마리가 긴 시간 난간에 앉았다 갔다. “왜 주다가 안 줘! 물 줘! 물 달란 말이야!” 마치 데모라도 하듯이. 측은지심이 올라와 물을 다시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연에 대한 간섭은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은혜 갚은 까치’ 설화가 떠올랐다. 한 남자가 까치 새끼를 잡아먹으려는 구렁이를 죽여 까치를 구해주었다. 남자는 캄캄한 밤중에 어떤 집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잠을 자는 사이에 구렁이가 온몸을 감고 남자를 죽이려 하였다. 그때 어디선가 종이 세 번 울리자 구렁이는 사라졌다. 남자가 종으로 가보니 종을 들이받은 까치가 죽어있었다.
이야기 속의 남자가 까치를 살린 것은 좋은 일이나, 구렁이를 죽인 건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다. 자연에서 까치와 구렁이는 먹이사슬 관계에 있다. 구렁이는 까치 새끼를 먹고, 또 까치도 구렁이 새끼를 먹을 수 있는 관계다. 둘은 서로 먹고 먹히면서 공존한다. 그 관계에 사람이 개입하여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은 전체론의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까치를 살리고 구렁이를 죽이는 것은 종 차별에도 해당한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 남자가 까치 새끼를 살려준 행위나, 이 남자가 새에게 물을 준 행위는, 둘 다 생태계에 개입하여 혼란을 주는 행위다. 측은한 마음도 지혜롭게 잘 다스려야 다른 생명체와 성공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 인류의 생존 지속이 여기에 달려있다.
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