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자타 공인 충성도가 높은 ‘이’ 고객이 계속 갈 수 있는 머리방, 지속 가능한 머리방을 찾아야 한다. 도대체 어떤 머리방이라야 지속 가능할까? 규모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머리방, 관리자의 나이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머리방, 개업이 너무 오래지도 가깝지도 않은 머리방, 고객에게 지나치게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머리방, 가격이 너무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머리방, 집에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머리방… 이런 머리방이 적절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머리방만 지속 가능성이 문제일까? 은하수 보는 건 포기해도 방독면을 써야 한다면 그 공기는 지속 가능할까? 깊은 산 계곡물은 포기해도 도시에서 마실 물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그 물은 지속 가능할까? 몇 해 전 살충제 달걀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안심하고 먹을 달걀이 없다면 그 달걀은 지속 가능할까? 오래전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해 온 세계가 공포에 떨었다. 인간 광우병에 걸려 죽지 않을 안전한 소고기가 없다면 그 소고기는 지속 가능할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먹은 물고기가 국산으로 둔갑한다면 그 물고기는 지속 가능할까? 농약을 지나치게 많이 뿌린 해로운 농작물밖에 없다면 그 농작물은 지속 가능할까?
앞서 말한 머리방의 지속 가능 조건처럼, 많지도 적지도 않은 먹을거리의 적절함, 다시 말해 너무 많이도 너무 적게도 먹지 않는, 너무 비싼 걸 탐식하는 부도 아니고 너무 싼 것을 먹어야 하는 가난도 아닌, 중립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그 중립의 평형을 많고 적음의 중간이 아니라 적게 먹는 방향에 두어야 하고, 비싸고 쌈의 중간이 아니라 싼 것을 먹는 방향에 두어야 한다. 한마디로 ‘절제(節制)’와 ‘절식(節食)’이 가장 바람직한 핵심어인 셈이다. 더욱이 값비싼 고기나 생선보다 싸고 맛있는 고기나 생선을 먹으면서 콩고기도 찾는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지속 가능성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생각이 아니라 실천을 좋아한다. 지속 가능성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싫어도 해야 하고, 너는 하고 나는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누구든 빠짐없이 해야 한다. 지속 가능성은 우리 공동체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없으면 너도 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