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6월 열린 국민투표에서 탈퇴 찬성 51.9%, 탈퇴 반대 48.1%라는 결과가 나오면서 영국 보수당 정부가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강행한 것에 대해 영국민의 생각이 7년 만에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르고 있다.
글로벌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민의 54%가 브렉시트는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58.2%가 지금 다시 브렉시트에 대한 국민투표가 열린다면 브렉시트를 백지화하는 방안에 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영국 여론조사업체 사반타에 의뢰해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도 브렉시트에 관한 2차 국민투표, 즉 유럽연합(EU)에 복귀하는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가 필요하다는 응답이 65%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민 65% “EU 복귀 문제 국민투표 부쳐야”
당장 국민투표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은 22%, 앞으로 5년 안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은 24%로 각각 조사된 반면에 20년 후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은 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민의 불만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줬다.
1년 전 조사에서는 55%였던 것이 그사이 10%포인트나 늘어 영국민 3명 가운데 2명꼴로 브렉시트를 사실상 백지화하는 방안에 대해 찬성 의견을 피력한 셈이다.
사반타 여론조사에서 브렉시트 백지화를 지지한 응답자들은 그 이유로 영국 경제가 브렉시트 이후 나빠졌다는 점과 국제 사회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역할이 줄어들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꼽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이번 여론조사를 진행한 사반타의 크리스 홉킨스 조사국장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상당수 영국 국민이 브렉시트가 불러올 효과에 대해 장밋빛 환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재계와 학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영국상공회의소가 최근 낸 성명을 통해 영국의 대EU 교역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줄 것을 영국 정부에 촉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과학 분야에서 최고 명문대로 알려진 런던정경대(LSE) 소속 연구진도 이달 초 발표한 보고서에서 브렉시트가 시행에 들어간 지난 2020년 1월 31일부터 지난 2021년 말까지 영국 가계의 식료품 관련 지출이 평균 210파운드(약 34만원) 증가한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브렉시트로 영국이 EU 회원국들 사이에 맺어진 관세동맹에서도 탈퇴하게 되면서 수입품에 그동안 붙지 않았던 관세가 새로 붙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 찬성파 “경제 악화는 우크라전·코로나 사태 탓”
이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민의 반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는 가운데 과연 현실적으로 영국이 EU 체제로 복귀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주 미국 영국대사관에서 브렉시트 및 통상경제 담당 공보관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는 브렉시트 전문가 케이틀린 그리어는 미국 정치매체 더힐에 올린 기고문에서 몇 가지 이유를 들어 EU 체제 복귀를 위한 제2의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성사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근거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 경제가 악화된 문제의 경우 브렉시트를 강행한 주역이자 리시 수낵 현 총리가 소속된 보수당 정권이 둘러댈 핑곗거리가 많다는 것.
유로존을 들썩이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 전쟁에 앞서 전 세계를 뒤흔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대표적이다.
영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브렉시트 때문이 아니라 전례 없는 사태가 최근 잇따라 터진 결과라고 주장할 여지가 브렉시트를 강행했거나 찬성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많다는 얘기다.
이는 브렉시트가 원인이 아닌데 국민투표를 왜 하느냐는 반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
◇‘윈저 프레임워크’도 완충지대 역할 가능성
아울러 현재 영국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수낵 총리가 인도계 유색 인종임에도 브렉시트를 적극 지지했던 정치 지도자라는 점도 아울러 감안해야 할 대목이라는 지적이다.
영국과 EU가 지난 2월 체결해 영국 하원을 통과한 ‘윈저 프레임워크’는 사실상 수낵 총리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수낵 총리는 이 때문에 향후 정부 운영에 힘을 얻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다.
윈저 프레임워크를 이해하려면 그동안 영국과 EU 사이에 브렉시트와 관련해 오갔던 협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북아일랜드는 영국 연방에 속하면서도 영국 본토 옆에 있고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에 위치한 관계로 영국은 애초에 브렉시트 협상 과정에서부터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국경통제 여부를 두고 협상 막바지까지 대립했었다.
영국은 국경 통제에 따라 통관이 시행될 경우 벨파스트 협정으로 간신히 봉합된 북아일랜드 분리주의 세력과 갈등 재발 가능성을 우려한 반면, EU는 국경 통제가 없을 경우 비EU 국가인 북아일랜드와 EU 회원국인 아일랜드를 넘나드는 제품들이 무관세로 불법 유입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팽팽히 대립했다.
영국과 EU는 오랜 협상 끝에 최종적으로 북아일랜드가 EU 단일시장에 잔류하고 영국과 북아일랜드 간 국경 통제를 시행하는 ‘북아일랜드 협약’에 합의했다. 그러나 브렉시트가 실제로 발효되면서 영국과 북아일랜드 간 통관이 시행되자 양국 간 제품 이동에 커다란 차질이 발생했다.
생필품 및 연료 부족 등 물류대란이 지속되자 영국은 EU에 북아일랜드 협약의 개정을 강하게 요구했고, 지난 2021년 10월부터 양측 정부의 개정 협상이 진행됐지만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던 끝에 지난 2월 수낵 정부가 EU와 윈저 프레임워크에 합의했고 영국 의회도 이를 뒷받침함에 따라 영국에서 북아일랜드로 유입되는 제품에 대한 통관 및 검역 절차가 대폭 간소화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브렉시트에 대한 불만이 영국민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EU 단일시장에 잔류한 북아일랜드를 통해 EU와의 교역이 여전히 가능한 상황이, 윈저 프레임워크를 통해 종전보다 통관 장벽이 낮아지면서 적어도 당분간은 숨을 돌릴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기 때문에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단계까지는 쉽게 가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