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대호의 천재적 작곡성은 미국과 스웨덴에서 잘 알려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노력하는 일개 작곡가일 뿐이다. 이른 가을, 나는 그의 음악을 접하러 통영에 갔었지만, 그가 작업하는 마을 풍경만 실컷 보고 온 적이 있다. 광기(狂氣)의 정치가 몰고 온 시대적 불안과 관련지으려는 듯 그의 오페라 작곡집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의미심장한 강조와 집중을 보여주었다. 작곡가는 이 시대의 호모사피엔스들이 자신이 죽어야 산다는 이치를 망각하고 자신들을 치켜세우면서 탐욕의 늪으로 빠져 사는 것 같다는 교훈을 담는다.
실내악 모음곡과 교향곡을 한 곡 한 곡 완성하고 있던 엄대호를 음악계에 데뷔시킨 음악가는 중앙대 교수 전인평이었다. 전 교수는 가능성의 엄대호에게 틈만 나면 성악곡을 만들 것을 권했다. 현대 스타일의 성악곡 작곡은 건반악기와 현악기를 기본으로 작곡해온 엄대호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어 오페라로 기획됐지만, 한글본이 먼저 발표됐다. 곧이어 갑진년 상반기에 현악 사중주가 바탕이 된 오케스트라 버전이 발표될 예정이다. 그의 발레 모음곡 '벤허'도 동시 버전으로 발표된 적이 있었다.
3막 43곡 구성의 오페라곡…미완의 대본으로 마음 고생
엄대호는 그의 교향곡 4번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작곡하기로 한다. 그러다가 탈진하면 미련 없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페라 대본이 문제였다. 주변 분들께 권해 보았으나 마무리를 볼 수 없었다. 작곡가의 독창적인 작곡 기법들은 무르익어 갔지만, 대본이 미완이라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엄대호는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한국국민악회’ 회장을 역임한 작곡가 정순영이 엄대호 작곡가의 고운 뜻을 받아들여 일사천리로 대본이 완성됐다.
엄대호는 ‘낮은 곳으로 임하여,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이고’ 반성과 겸허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3막 구성의 풀사이즈 오페라다. 2막 ‘십자가 처형’의 교향곡적 춤곡을 비롯해 모두 5곡의 발레가 포함돼 있다. 연주 시간은 총 2시간40분이다. 엄대호는 교향곡 3번 '익투스', 교향곡 4번 '노아의 방주'를 마쳤고, 교향곡 5번 '마라나타'를 구상 중이다. 그사이에 2016년에 계획한 현대 작곡 기법이 가미된 오페라 <예수 그리스도>를 8년 만에 발표하게 된 것이다.
엄대호는 조금만 더 남국의 햇살을 끌어다가 포도를 온전히 익게 하자는 릴케의 ‘가을날’이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가는 김광균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이 버티는 늦가을 풍경을 넘어왔다. 이른 겨울, 군불을 지피는 마음으로 따스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엄대호는 최근 3막 43곡의 오페라 곡(1막: 19곡, 2막: 15곡, 3막: 9곡)을 완성했다. 1막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의 2곡 '광야의 춤'은 진화된 판타가 조성이다. 릴레이식 각 성부의 대비는 춤곡의 강한 이미지를 발산한다.
교향악적 춤곡•발레 5곡 등 감성적 분위기의 선율 진행
에피소드는 작곡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일들이 작곡가 자신에게도 그대로 전해졌고 이런 작품은 구약성경 속의 아브라함이 늦둥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듯이 작곡가도 그런 마음이 있었고 그 뜻을 정직하게 행해야 완성됨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8곡과 10곡은 응용된 ‘판타가’를 통해 대본으로 풀어낸 곡의 유기적 연관성이 정체성을 보여주었고 14곡은 선율 진행이 감성적이다. 후반부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신비감으로 강렬한 영적 분위기를 준다. 리듬은 페미니즘으로 유도되어 단조로움을 잊게 한다.
작곡가가 가장 중점을 두고 쓴 2막 '예수님의 수난'에서 2곡과 7곡은 이율배반적 표현 기법이 짙고 자유대위법을 응용한 선율의 맥락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며 현악 사중주로 구성된 빼곡한 틈바구니에서 스토리를 정초시키며 공간성을 박제화하고 있다. 춤곡인 8곡 '파스카 축제'는 피상적인 선율 강조보다 내적 감정 묘사에 주력하고 있으며, 주제에 힘을 부여한 유일한 교향적 춤곡인 14곡 '십자가 처형'과 15곡 '테텔레스타이'는 주제성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 선율이 압축적이고 냉혹하다.
3막 3곡 '감격의 춤'에서 단순하면서 즐거운 음조와 빈틈없는 형식은 대위법 기교 이상의 내적 숭고함을 담고 있다. 7곡과 8곡은 극도로 순수한 구성을 위해 지속적 변주와 반복의 현악 4중주로서 억압적이나 지배적 코드가 도출된 음악적 힘을 준다. 피날레용 9곡 '승천'은 테마 선이 톱니바퀴 같은 순환 구도로서 신성함과 사이키델릭한 다큐멘터리가 조명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대위법을 축으로 응용미를 살린 판타가 기법으로 예술적 끼를 토해내는 작곡가의 숨은 열정이 감지된다.
풀 스코어의 제목을 살펴본다. 막 속의 곡은 다음과 같다. ‘1막,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1. Overture 2. 광야의 춤 3. 나병환자에 대한 4. 베드로의 물음 5.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무리이까 6. 통치자의 지침 7.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불행 선포 8.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 9. 백인대장의 노예 이야기 10. 더러운 영이 들린 딸 이야기 11. Intermezzo 12. 성전에 올라온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13. 예레미아 예언자 비유 14. 모세와 놋뱀 15.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마라 16. 빌라도의 만행 17. 예수는 구원의 빛 18. 벳자타 연못의 환자 19.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신 기적
영어 오페라로 기획됐지만 한글본으로 먼저 완성 발표
‘2막, 예수님의 수난’: 1. Prelude 2. 눈이 멀고 말 못 하는 사람 이야기 3. 하나님은 소출을 내는 민족들에게 주신다 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5. 성전 상인들과의 일화 6. 무화과 나무 비유 7. 바리사이의 협작 8. 파스카 축제 9. 옥합을 깨뜨린 여인 10. 유다가 예수님을 팔 기회를 노리다 11.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12. 예수를 잡다 13. 예수가 고문당하다 14. 십자가 처형 15. 테텔레스타이 ‘3막, 예수님의 부활, 승천’: 1. Prelude 2. 무덤 밖 천사와 마리아 3. 감격의 춤 4. 엠마오로 가는 길 5. 열한 제자와 만남 6. 토마스의 의심 7.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 8.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9. Finale 승천
갑진년, 신작 행렬의 시작은 노력하는 천재 작곡가 엄대호의 피아노 선율로 시작된다. 남쪽 바다에서 퍼 올린 거룩한 가르침은 사랑의 사다리를 타는 것이다. 그의 최신작 <예수 그리스도>의 영문판이 출판되어 스웨덴 왕실과 웁살라대학에 보내졌다. 신년 1월 초에 음반 3집도 출시될 예정이다. 구세군의 사랑의 열매는 올해에도 사랑의 온도를 높였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엄대호의 선율이 스며들기를 기원한다. 올해에는 통영 동피랑 마을에도 엄대호의 음악 열기가 퍼져 엄대호의 곡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원한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