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조사 결과는 미국 전역의 정치학자 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브라이트라인 워치(Bright Line Watch)’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민주주의가 퇴행했음을 보여준다고 NPR은 전했다.
다트머스대 정부학과의 존 캐리 교수는 “지난해 11월 대선 직후 학자들이 평가한 미국 민주주의 점수는 67점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뒤 수 주 만에 55점으로 떨어졌다”며 “조사 시작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이며 학계 전반적으로 ‘잘못된 방향’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고 말했다.
이번 설문은 △언론에 대한 정부의 간섭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보복 여부 △입법부 및 사법부의 견제 기능 유지 여부 등 민주주의 기능을 판단하는 30가지 지표를 기반으로 진행됐다. 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NPR과 인터뷰에서 “미국은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며 헝가리나 터키처럼 ‘경쟁적 권위주의’ 체제로 진입한 상태”라고 평가했다. 경쟁적 권위주의란 겉으로는 선거 등 민주주의 형식을 유지하되, 실질적으로 권력 분립과 견제가 무너진 체제를 말한다.
킴 레인 셰펠레 프린스턴대 교수는 “미국은 지금 헝가리와 매우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다”며 “정부가 검찰, 법원, 언론, 대학, 시민단체를 장악하면서 체제의 균형이 붕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NPR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공영방송인 NPR과 PBS, 주요 방송사의 편집 방식과 협찬 구조를 문제 삼아 연방통신위원회(FCC)를 통해 조사에 착수했으며 방송 면허 취소 가능성도 열어둔 상태다. 단, 폭스뉴스를 보유한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그룹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하버드, 프린스턴, 컬럼비아 등 주요 명문대학을 상대로 ‘반유대주의 대응 미흡’ 등을 이유로 수십억 달러의 예산을 삭감하거나 삭감 위협을 가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셰펠레 교수는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비판적인 대학에 40% 예산 삭감을 단행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제임스 캠벨 뉴욕주립대 명예교수는 “트럼프는 정당한 대통령 권한을 사용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며 “정치적 편향으로 인해 그를 과도하게 권위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있다”고 반박했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43%로 지난 대선에서 전체 득표율이 과반을 넘지 못했던 점을 감안하면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나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처럼 절대적인 대중 지지를 바탕으로 체제를 재편한 사례와는 다르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