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앞의 시는 최승자(1952~ ) 시집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년)에 보인다. 그 당시 시인의 나이는 서른(30세)이었다.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삼십 세' 부분)고 했다.
30
“이런 시가 있었네, 우리나라에.”
시집으로 30만부 판매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1961~ ) 시인의 말이다. 말은 최영미의 <시를 읽는 오후>에 나온다. 최승자의 시를 “서른 살 무렵에 처음 읽고 휘청거렸다”고 적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자신의 첫 시집에 추천사를 받기에 이른다. 두 시인 모두 ‘삼십 세(30)’가 빚은 아름다운 인연일 터. 이때부터 서로가 얼굴을 겨우 트는 풋낯이 비로소 시작되었으리라.
재일교포 2세인 강상중(姜尙中, 1950~ ) 도쿄대 교수는 청춘에서 잊을 수 없는 책으로 시인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대한민국 청춘들을 향해 필독서로 추천한 바 있다.
나는 이 시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열일곱 살 강상중은 그랬다. 서구 현대시의 길을 터놓은 것으로 유명한 19세기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여행으로의 초대’라는 시를 처음 읽고 “온몸이 떨릴 만큼 감동적이었다”라고 말했는데 최승자의 ‘개 같은 가을’을 두고서 느낀 처음 감정도 천하의 최영미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던 것만 같다. 온몸이 떨림이나 휘청거림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 때문이다.
최승자와 최영미는 아홉 살 차이다. 그럼에도 최영미는 최승자에게 아주 깍듯하다. 존경과 예의를 차린다. 마찬가지로 에두아르 마네는 열한 살 위인 샤를 보들레르의 시를 읽고 그를 받들어 존경했다고 전한다. 그 이야기는 조원재 작가의 <방구석 미술관>(블랙피쉬, 2018년)에도 등장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마네가 존경하며 사상적 스승으로 여긴 사람이 바로 보들레르이다.” (같은 책, 178쪽 참조)
또 이런 내용이 같은 책에 소개되고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1876년, 44세 마네는 성병인 임질에 걸리고 맙니다. 의사가 관절염으로 오진하는 바람에 병세가 계속 악화되었죠. 다리부터 시작된 마비증상은 온몸으로 퍼졌고, 마네는 결국 51세 나이로 사망합니다. (중략) 심각한 근육통과 마비 증세로 심신이 모두 피폐해진 마네는 사망하기 1년 전, 그림 하나를 완성합니다. (중략) 최후의 걸작입니다. <폴리베르제르 바>입니다. 마네는 당시 인기 있던 술집 폴리베르제르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 술집에서는 음주뿐만 아니라 춤을 추고 서커스 공연까지 즐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략) 잘 살펴보세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전경의 바텐더 여성의 뒷모습이 배경에 비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배경은 뚫려 있는 공간이 아니라 거울이었던 것입니다. 마네는 거울 앞에 서 있는 여인을 그린 것입니다. (같은 책, 190쪽 참조)
나는 조원재의 글과 처음 본 <폴리베르제르 바> 그림을 통해서 최승자의 시 ‘개 같은 가을’이 민낯이 되어 겹쳐 보였다. 그림 속 주인공으로 보이는 바텐더 즉 여종업원-이름이 쉬종(Suzon)-의 무표정하고 지루하며 차가운 눈빛은 어딘가 일에 집중하지 못한 화난(?) 불만족스러운 인상으로 술집 분위기와 잘 조화되지 못하는 것 같아 어색하게 느껴진다. 군중 속의 고독함이 짙게 덧칠되어 그림에 오롯이 배어져 있다.
바와 큰 거울 사이의 비좁은 공간의 그녀는 홀로 무슨 상념에 빠져 있는 것일까?
거울에 비친 여인의 뒷모습이 앞의 중앙을 차지하는 이 그림에서 살짝 우측으로 눈을 돌리면 모자 쓴 콧수염의 신사가 하나 크게 보인다. 양복 입은 신사의 작업(?) 멘트에 정말 재미없다는 표정인 것을 보자면, 그녀의 다문 입술이 곧 벌어지면서 금방이라도 욕이 삐죽하고 나올 것만 같다.
“개 같은…어디서 개수작이야”
이런 말이 곧장 혀로 비집고 욱하면서 뛰쳐나올 것만 같다. 다시 말해서, 마네는 그림을 통하여 삶의 마지막 길목에서 마비된 병든 몸을 억지로 추스르면서 당시 상류사회의 추악함과 악랄함을 안간힘을 다해서 그리면서 고발하고 풍자하고 싶었던 것은 혹여 아니었을까?
어쩌면 자신(마네)을 망치고 병들게 한 시대를 그림으로 묻고 싶었을지도 정녕 모를 일이다.
2020년! 개 같은 가을이 옆에
다시 미술관·박물관이 휴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시 주춤했던 코로나19 기세가 빨리 예전 분위기로 회귀하려던 우리들로 하여금 발목을 묶게 한다. 다시 마스크를 챙기고 쓰도록 만든다. 이거 참, 어이가 없다. 도로 ‘집콕’을 하게 하니 말이다. 방구석에 엉덩이를 붙들어 놓으니 더러는 욕이 나온다. 그래서 여름 장마가 끝났어도 “개 같은 가을”이 옆에 온양, 마냥 좋아만 할 수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이 넉 줄의 시로 내 기분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싶다. 다시 시를 읽으면서 나는 책 속으로 그림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므로.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1980년대. 그 시절엔 핸드폰이란 게 없었다. 집전화도 귀했다. 누군가와 연락할 일이 생기면 공중전화가 제일 쉬웠다. 한 남자가 공중전화 전화기를 부여잡고 술에 취한 목소리로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하며 찾지만 이미 한번 마음이 떠난 그 여자는 일체 응답하지 않는, 사랑법이 그때는 있긴 했다.
그리하여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는 게 일상사로 다반사였다. 그랬다. 노랫말처럼 슬프게도 서른 즈음에는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강물은 언젠가는 바다로 가게 마련이다. 코로나19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하는 물음은 부질없는 처신이고 사랑이나 도무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랑의 방법, 삶은 행복과 불행을 항상 함께 가지고 있다
“시인은 누구나 자기의 삶을 행복으로 노래하거나 불행으로 노래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자기 주변에 대한 사랑, 자기 시대에 대한 사랑의 방법이다. 행복으로 노래하는 시인은 삶의 여러 가지 양상 가운데 불행이 없는 삶에 대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불행으로 노래하는 시인은 행복이 있는 삶에 대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기원은 사실은 시인의 이상주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삶은 행복과 불행을 항상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고(故) 김치수(金治洙, 1940~2014) 선생의 글이다. 글은 최승자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의 해설로 게재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사랑이 있는 시대, 사랑이 있는 정치, 사랑이 있는 역사를 꿈꾸는 사람”
소설가 박완서(朴婉緖, 1931~2011) 선생의 일침이다. 소설가도 시인도 화가도 그 시대를 사는 작가들이긴 마찬가지다.
출판사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가 쓴 <스무 해의 폴짝>(마음산책, 2020년)을 올 여름, 집에서 뒹굴면서 신나게 읽었다. 재밌다!
책엔 작가 호원숙이 등장하는데 박완서의 장녀라고 한다. 아무튼 박완서의 유명한 ‘노란집’은 서울 중랑구 아차산의 그늘 아래 한적한 곳에 전원주택인데, 그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눈앞이 환해지는 정원의 꽃들과 나무, 맑은 소리를 내는 처마 끝 풍경”이 1998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정 대표는 책에다 적었다.
이 책에는 20명의 뛰어난 우리 시대의 작가들, 근황 모습이 사진과 글로 담아져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소설가 김금희, 조경란 등이 ‘시 읽기’에 매우 열심인 것을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그게 참, 고마웠고 기뻤다!
소설가 조경란은 이렇게 인터뷰에 응답했다.
“제가 매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말하곤 했어요. 일기 쓰기와 시집을 읽는 일, 그런데 이제 일기는 매일 안 쓰거든요. 일주일에 한두 번 쓰는데 시는 정말 매일 읽죠. 좋은 시인들의 언어를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다루면서 삶의 틈새를 보여주는 방식을 매일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시가 언어의 정수라고 생각하거든요. 시집은 읽었던 거 또 읽어도 새롭죠.” (같은 책, 178쪽 참조)
올해 들어서 나 또한 시집을 매일 꺼내 읽고 있다. 더불어 그림 관련 에세이 책도 보고 또 보는 중이다. 세상은 지금 엿 같고 개 같긴 한데, 나는 방구석에 앉아 옛 사람들과 벗하는 ‘상우천고(尙友千古)’를 맘껏 누리고 있다. 그러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끝으로 시 한 편을 더 여기에 소개한다. 내가 사랑했던 ‘그’와 ‘그녀’를 생각하며 잠시 웃게 될 것이다. 특히 하루가 저무는 “땅거미 질 무렵”의 시간이 다가오면 틀림없이 그렇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다음이 그것이다.
여자들과 사내들 /최승자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어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사내의 눈물 한 방울
망막의 막막대해로 삼켜지고
돌아서면 그뿐
사내들은 물결처럼 흘러가지만,
허연 외로움의 뇌수 흘리며
잊으려고 잊으려고 여자들은
바람을 향해 돌아서지만,
땅거미 질 무렵
길고 긴 울음 끝에
공복의 술 몇 잔,
불현듯 낄낄거리며 떠오르는 사랑,
그리움의 아수라장.
흐르는 별 아래
이 도회의 더러운 지붕 위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
이 시는 언제 펼쳐 읽어도 느낌이 새롭다. 이제는 일흔의 나이가 거의 되었을, 최승자 시인은 요즘의 청춘들, 여자들과 사내들을 또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여전히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는 그런 모습이던가요?
최 선생님의 시 ‘개 같은 가을이’를 마주하면 나는 왜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폴리베르제르 바(A Bar at the Folies-Bergere)>가 자꾸만 보일까요?
1981년 가을. 최승자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이 서점가에 처음 나왔다. 올해 8월 중순. 스테디셀러 <이 시대의 사랑>은 여전히 팔리고 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드라마 제목으로 쓰이고 있는 시대이다. 따라서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또한 미니시리즈로 방송이 제작되어 곧 나오길 나는 희망한다.
1981년 1월~6월. 제1부의 시제들은 18부작 미니시리즈 소제목으로도 손색이 없다.
제1화 일찍이 나는
제2화 개 같은 가을이
제3화 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
제4화 해남 대흥사에서
제5화 네게로
제6화 여자들과 사내들
제7화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이와 같이…
소설가는 시를 열심히 본다. 방송작가 중에도 시를 사랑하는 이가 없진 않을 것이다.
◆ 참고문헌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최영미 <시를 읽는 오후> (해냄, 2017)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
조원재 <방구석 미술관> (블랙피쉬, 2018)
강상중 지음, 이목 옮김 <청춘을 읽는다> (돌베개, 2009)
정은숙 <스무 해의 폴짝> (마음산책, 2020)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