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이윤학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놀랄 노릇이다. 첫사랑을 시로 이만큼 처연한 표정으로 만들어 긴 여운을 주다니…. 다 지난 추억인데도 독자로 빠져들 밖에. 그 덕분일까,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그’가 미치도록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리움으로 먹먹해졌다.
시인 이윤학(李允學, 1965~ )의 첫사랑은 시집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문학과지성사, 2000년)에 슬몃 보인다.
나의 초등학교 동창회는 2000년에 처음 열렸다. 여느 동창회와 마찬가지로 친구였던 이성을 향한 첫사랑이 제법 파란을 일으켰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이 그랬던가. “한스럽구나! 사람의 마음은 강물만 못해서, 대수롭지 않게도 평지에서도 파란을 일으킨다(長恨人心不如水, 等閑平地起波瀾)”라는 시적인 노랫말처럼 웅성웅성 첫사랑을 찾는다고 야단법석을 시끌벅적 떨었다. 다 지난 과거사가 지금은 되었지만.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人生若只初如見)”
그런 만남은 꿈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현실에선 아예 없어서다. 없고 드물기 때문에 ‘한 줄의 시’에 우리의 가슴은 벅차오르고 쉽게 감동하는 것이다. 일찍이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1910~2007) 선생은 인생에서 첫사랑과 인연에 대해서 이렇게 결정적인 한방으로 정리해서 조언한 바 있다. 글은 스테디셀러 <인연>(샘터, 1996년)에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중략)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중략)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중략)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을 들러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중략)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중략)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중략)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같은 책, 133~137쪽 참조)
우리 나이로 마흔 다섯. 이즈음에 피천득 선생도 첫사랑 아사코가 보고 싶어 우여곡절 끝에 만났는데 결론은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걸 보자면, 첫사랑은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를 매일 들여다보는 미련함 혹은 집착일지언정 내 기억 속에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로 정지하는 것이 좋다.
첫사랑을 멀리 바라보면서 오래 간직하는 게 직접 수차례 만남을 시도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을 것이다. 설사 그대가 꺾어준 꽃인들 시든 다음에야 무슨 소용이고 어찌 두어 번, 또 필 수 있단 말인가.
한국인에게 첫사랑의 원형적 이야기로 남아 있는 황순원의 <소나기>는 말 그대로 소나기이기에 아름답다. 길고 지루한 장마였다면 이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 작품의 소년과 소녀는 결혼해서 새벽 세 시에 아기 기저귀를 갈아보지 않았다. 첫사랑과의 결혼은 문학 작품의 소재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생활 다큐멘터리일 뿐이다.
고등학교 국어교사 출신 김경민 작가의 일갈이다. 그의 신간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포르체, 2020년)에서 퍼온 내용이 그렇다. 그러니까 첫사랑은 소나기 같은 것이어서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뿐이고, 길고 지루한 장마와 같았다면 독자에게서 사랑을 오랫동안 받을 수 없는 시시콜콜한 얘깃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와 같이 여기, 아름다운 우리 옛 그림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옛 그림 <서생과 처녀>를 보다가 나는 그만 시인 이윤학의 <첫사랑>이 떠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의 18세기,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단칸의 서방(書房)이 클로즈업 샷으로 처리되고 있다. 과거시험 준비라도 하는 건가, 서방의 서생은 작정한 표정으로 때를 맞춰 왼손으로 오른 쪽 옷소매를 걷어 올리는 중이다.
왜냐하면 이웃집 처녀가 이 시간이 오면 몰래 찾아드는 걸 서생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살 사이로 등잔불이 얼비치는 것을 감안하면 저녁밥을 먹은 다음 시간쯤으로 얼른 짐작이 된다. 밤늦도록 책을 읽는 서생의 낭랑한 목소리에 이끌려서 도둑고양이 발걸음으로 처녀는 밤이면 밤마다 찾아들었을 것이다. 휙~하니 가을바람이 훅 분다. 서방에 계신 님의 여닫이 창문이 닫힐세라 오른 손을 쭉 뻗어서 잽싸게 움켜쥔다. 왼 발이 긴치마 앞으로 불쑥 비집고 나온 모양새를 보니 급하긴 급했던가 보다. 치렁치렁한 낭자머리의 처녀가 서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몸가짐이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손철주 선생은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현암사, 2011년)이란 제목을 단 책에 특유의 해박한 설명을 달았다. 다음이 그것이다.
정황이야 캐볼 바 없다. 처녀는 서생을 마음에 품은 지 오래다. 밤바다 고양이 걸음질로 다가가지만 서생은 돌아앉은 목석이다. 애절타. 상사병이 달리 오랴. (중략) 그림은 실박하다. 혜원 신윤복의 붓질을 따라 그렸지만 혜원 그림은 아니다. 세련미가 뒤진다. 하여도 시골 처녀의 꾸밈새처럼 수더분해서 정겹다. 서책 덮고 등불 끄고 서생이 잠들어야 저 처녀 돌아갈까. (같은 책, 193쪽 참조)
서방님이 과연 암것도 모르는 돌아앉은 목석이었을까? 나는 그가 눈치로 알았으리라, 상상이 된다. 책상 앞에 앉아, 막 책을 읽으려는 포즈가 마치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하는 작정이 잔뜩 옷소매로 전달이 되어서 걷어붙임이 의도인양 보여서다. 어쨌든 다정다감한 우리 옛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림 속 우리 ‘님’은 책만 왜 죽도록 읽는 것일까
반듯한 정자관에 또렷한 이목구비. 그림 속 남자는 서방에 앉아 있다. 저 사람이 내가 짝사랑하는 그 남자이다. 기둥에 숨은 처녀의 눈빛과 입술이 금방이라도 이윽고 “아하! 서방님”하고 쏟아져 나와, 나직하게 들릴 것만 같다.
저 남자의 집은 온통 사방이 벽이고 책만 들어있을 것 같다. 가난한 서생이 부자가 되고, 귀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고작 조선은 ‘과거 급제’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하는 길 밖에 없었다.
중국 북송 시대의 재상을 지낸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그림 속 인물처럼 오로지 책만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기 처지를 빌어 말하길 “가난한 사람이 책으로 인해 부자가 될 수 있다(貧者因書富)”라고 후인들에게 강조했던 것이다.
왕안석의 라이벌 소식(蘇軾, 1037~1101)은 또 어땠는가. 그는 말했다. “가난하기는 쉬워도 부유하긴 어렵다. 고된 노동에 만족하긴 쉬워도 한가함을 참기는 어렵다. 아픔을 참을 수는 있어도 상처를 견디긴 어렵다”라고 말이다.
중국사(中國史)를 관통하는 러브스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애 이야기가 ‘서생과 돌싱녀’의 결혼이 있긴 하다. 중국 한나라 때, ‘사마상여와 탁문군’이 그 주인공이다. 탁문군은 엄청난 부잣집 딸로 돌싱녀(돌아온 싱글녀)로 잘 있다가, 어느 날이었던가. 아버지의 집으로 고을 현령과 함께 초대를 받아 녹기금(綠綺琴·푸른 비단처럼 아름다운 거문고의 일종으로 사마상여가 타던 거문고의 이름)을 타던 사마상여를 처음 보게 된다. 까치발 들어 주렴 너머로 애써 곁눈질까지 해서.
남자의 책 읽는 소리와 거문고 연주에 옛 여인들은 약했고 녹았다.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귀밑머리 고운 탁문군의 자태를 멀리서 얼핏 본 사마상여는 작정을 한 듯이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음악의 속뜻은 머진 사내(鳳)가 어여쁜 여자(凰)를 구(求)한다고 해서 ‘봉구황(鳳求凰)’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봉새여, 봉새여, 고향으로 돌아왔구나
짝을 구하려 사해를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이제까지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였거늘,
오늘 밤에 이 집에 오를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아리따운 숙녀는 규방에 있으니,
방은 가까우나 사람은 멀어 애간장을 녹이누나.
무슨 인연으로 한 쌍 원앙이 되어 서로 목덜미를 부빌 수 있겠는가?
서로 오르내리며 높은 하늘로 함께 날고 싶어라.
봉새여, 봉새여, 짝을 따라 머무르렴.
서로 받쳐 올려 영원히 그대의 비로 삼으렴.
정을 나누고 몸이 통하여 필시 조화를 이룰 것이니,
깊은 밤 서로 따를 이 또 누가 있겠는가?
두 날개 활짝 펴고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르고 싶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어 나만 홀로 슬퍼하네.
그림 속의 서생이 읽는 구절이 혹여 ‘봉구황’ 그 대목이 아니었을까. 다만 그림을 그린 이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시골 처녀가 부잣집 딸이긴 해도 배운 바, 일천하여 책 읽는 소리가 좋기 해도 무슨 말인지 눈치를 채진 못함이 그저 보기 안쓰러워서 그림으로 남겼던 것은 아닐까, 나는 옛 그림을 보면서 그만 실없이 웃으면서 상상한다.
사마상여의 연주가 있던 그날 밤이다. 문군은 야반도주를 했다. 둘이서 사마상여의 집에 도착했을 때, 문군의 눈에 보인 그 집은 다 쓰러져가는 초옥(草屋)으로 단칸 방이고, 방의 사방엔 벽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나머지 이야기는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사마 열전’에 자세히 등장한다.
부디 그림 속 처녀가 애오라지 참기만 하거나 그저 울기만 하는 여인이 아니었길 나는 희망한다. 마찬가지로 그림 속 남자 또한 짐짓 점잖음만 떨 것이 아니라, ‘예스’인지 ‘노’인지를 분명히 동네 처녀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아무튼 짝사랑은 못할 짓이다. 반면에 첫사랑은 이루지 못했기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음을 제발! 남자들이여, 우리 찬 바람이 불 때가 오면 잊지 말고 명심하자.
세 번째는, 남자 나이로 마흔 중반이 지났다면 서로 보지 않는 것이, 굳이 찾지 않는 것이 도리이고 에티켓이다. 이 나이에 보고 만나서 또 어쩌려고 자꾸만 그러시나? 그래서 나는 ‘여사친’이란 말이 더 좋다.
◆ 참고문헌
이윤학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문학과지성사, 2000.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포르체, 2020.
손철주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현암사, 2011.
안이루 심규호 옮김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 에버리치홀딩스, 2009.
피천득 <인연>, 샘터, 1996.
심상훈 <공자와 잡스를 잇다>, 멘토프레스, 2011.
햔샤오궁, 백지운 옮김 <열렬한 책읽기>, 청어람미디어, 2008.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