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 물굽이 조그만 슬래브 집
노란 감국 몇 송이 피어 있고
그 옆에 붉은 호박색 손수레 하나 누워 있네.
어디선가 털 고운 흑갈색 점박이 개가 나타나 꼬리
를 흔들자
현관문이 열리고
눈매 잔잔한 그가 모이 주머니 들고 나오네.
부르지도 않았는데 곤줄박인가 검은 머리 새들
여남은 마리 날아들어 재게 걸으며 끝이 흰 뾰족한
부리로
연신 모이 쪼기 바르고
한 마리는 모이 든 손에 날아와 앉아
밤빛 배 슬쩍슬쩍 보라는 듯 회청색 날개 퍼덕이네.
손에 오른 새 앞에 두고 다른 팔은 벌리고
발길을 길게 짧게 길게
그가 원을 그리며 신명나게 몇 바퀴 돌았네.
삶이 뭐 별거냐?
몸 헐거워져 흥이 죄 빠져나가기 전
사방에 색채들 제 때깔로 타고 있을 때
한 팔 들고 한 팔은 벌리고 근육에 리듬을 주어
춤을 일궈낼 수 있다면!
시는 황동규(黃東奎, 1938~ ) 시집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 2013년)에 나온다. 시적 풍경이 늦가을 냄새 짙은 환희를 솔솔 풍긴다. 시로 시작되는 “북한강 물굽이 조그만 슬래브 집”의 지붕은 상상하건대 아마도 가을 하늘과 닮은, ‘파란 지붕’이 실체이지 싶다.
시를 읽기 전보다, 이 시를 읽고 난 후에 나는 북한강을 자주 찾는 편이다. 그러면서 청평, 양평, 가평 혹은 강원도 화천의 북한강가에 이웃한 마당 딸린 집, 파란색 슬래브 지붕이 불쑥 보이면 “어디선가 털 고운 흑갈색 점박이 개가 나타나 꼬리를 흔들”어 보이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까치발을 하고서 이곳저곳을 수상한 사람처럼 기웃댔더랬다.
십일월, 어느 늦은 오후
11월의 어느 날. 늦은 시간에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청미래, 2011년)이란 책을 다시 덥석 꺼낸 독서하는 오후였다. 책에서 인상적인 글이 한눈에 보였다. 다음과 같다.
“자연을 자주 여행하는 것이 도시의 악을 씻어내는 해독제” (같은 책, 178쪽 참조)
이 청량한 말은 1850년에 여든 살의 시인, 워즈워스가 했다고 한다. 영국 왕실의 계관시인, 월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장수 비결이 혹여 난, 그 말에 있었지 싶다. 또한 황동규 시인의 혈기 왕성한 노년의 시작 활동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섣부르게 주장하고 싶다.
손에 오른 새 앞에 두고 다른 팔은 벌리고
발길을 길게 짧게 길게
그가 원을 그리며 신명나게 몇 바퀴 돌았네.
삶이 뭐 별거냐?
몸 헐거워져 흥이 죄 빠져나가기 전
사방에 색채들 제 때깔로 타고 있을 때
한 팔 들고 한 팔은 벌리고 근육에 리듬을 주어
춤을 일궈낼 수 있다면!
나는 황동규의 시에서, 이 부분이 특히 좋았다. 왈츠 풍의 음악이 들렸다. 시적 화자가 춤추는 모습이 한 편의 명화처럼 그려졌다. 그러면서 에드가 드가의 ‘무대 위 발레 리허설’ 속에 검정 양복 입은 선생님의 몸짓과 손짓으로 “한 팔 들고 한 팔은 벌리고 근육에 리듬을 주어/ 춤을” 추고자 하는 ‘나’의 그 활기찬 열망의 순간이, 진짜 사는 기쁨의 정체가 아닐까 잠시 생각했더랬다.
그렇다.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춤을 일궈낼 수 있는 노년의 삶을 북한강가 같은 그림 같은 자연 속에서, 마당 딸린 조그만 슬래브 집(매력적인 장소)을 짓고 산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멋지고 낭만적인 일이다. 그 잉여의 시간, 그것이 나에겐 매우 소중할 밖에 없다.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란 책을 보다가 이런 글에 나는 연필로 밑줄 친 적이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집 옆에는 보랏빛 라벤더 밭이 있었고, 그 옆에는 노란 밀밭이 있었다. 건물 지붕은 오렌지 색이었고, 그 뒤로 순수한 파란색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녹색 초원에는 빨간 양귀비가 점점이 박혀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협죽도가 자라고 있었다. (같은 책, 252쪽 참조)
이 문장이 나는 황동규의 ‘북한강가에서’의 조그만 슬래브 집으로 좁혀지면서 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카페 창업을 한다면 황동규의 시와 드 보통의 글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집을 꾸미고, 마당을 조경하는 것이 최상으로 좋을지 얼른 짐작이 되고 데생이 가능해져서다.
일본의 심리학자이자 독서광으로 유명한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郞, 1956~ )’가 펴낸 신간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인플루엔셜, 2020년)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다음과 같다.
같은 책이라도 처음 본다고 생각하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듯이 매일 만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늘 처음 만났다고 생각하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과거를 잊어야 할 때도 있다. (같은 책, 67쪽 참조)
똑 같은 책이더라도 다시 읽게 되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느낌을 준다는 얘기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북한강가에 가더라도 전에 느꼈던 비슷한 감정의 같은 강의 모습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 편의 시와 그림이 주는 메시지와 감정도 자꾸 보면 변화한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우리 주변의 산하(山河)처럼.
마음에 평안이 회복되는 그림의 힘과 시
알베르트 비어슈타트(Albert Bierstadt, 1830~1902)의 그림 ‘하구에서’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가장 먼저 황동규 시인의 ‘북한강가에서’가 생각이 났다. 그림 속에는 점박이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말하자면 강물을 마시는 검정빛과 하얀색 소 뒤로 펼쳐지는 늦가을의 노랗고 빨간 나뭇잎과 드높은 하늘색과 흰 구름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에 평안이 찾아들었다.
다시 두 번째로 그림을 감상할 때이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 나는 황동규 시가 아니라 중국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 시 한 편. ‘아침 차가운 강에서 생각에 잠겨(早寒江上有懷)’를 기억서랍에서 끄집어내고 있었다. 시의 전문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참고로 우리말 번역은 심규호 교수(제주산업정보대학)가 한 것이다. 그대로 여기에 옮긴다.
낙엽은 지고 기러기 날아가니,
북풍에 강가 차갑기만 하여라.
내 고향은 양수 굽이치는 곳,
아득히 멀리 초나라 구름 끝머리에 있네.
고향 그리운 눈물은 나그네 생활로 다하고
외로운 돛배에서 하늘가만 바라보네.
나루터 가는 길 헤매다 길 물으려 하니
잔잔한 강물 위로 저녁 해 기운다.
木落雁南渡 (목락안남도)
北風江上寒 (북풍강상한)
我家襄水曲 (아가양수곡)
遙隔楚雲端 (요격초운단)
鄕淚客中盡 (향루객중진)
孤帆天際看 (고범천제간)
迷津欲有問 (미진욕유문)
平海夕漫漫 (평해석만만)
반복해서 비어슈타트의 ‘하구에서’라는 그림을 감상할 때 나는 하마터면 중국 산수화처럼 제화시를 화면 위쪽 하늘가에 적고 싶은 욕구와 충동이 강하게 마음 밑바닥에서 소용돌이로 파문처럼 일렁였다. 요컨대 “나루터 가는 길 헤매다 물으려 하나/ 잔잔한 강물 저녁 해 저문다”라는 마지막 구절을 고스란히 옮겨 베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북한강가에는 수많은 예쁜 집과 카페가 즐비하다. 하지만 나의 여행이 모자라고 좁은 탓에 황동규 시 속의 슬래브 집, 마당 한쪽에서 왈츠 혹은 재즈의 춤 동작으로 부드럽고 황홀하게 추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차는 감성적인 카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에 내가 여행을 또 떠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림과 시의 색채, 도시의 악을 해독하다
비어슈타트의 그림과 황동규의 시의 색채는 한마디로 늦가을 분위기이다. 검푸른, 노란, 적갈색, 붉은 호박색, 흑갈색, 검은, 흰, 밤빛, 회청색의 물감으로 글을 적으면 시가 되고, 그림으로 그리면 강가의 하구(河口) 물굽이, 화면 바깥엔 파란색 슬래브 지붕의 ‘그’의 집이 보일 것만 같다. 그 집에는 아마도 “눈매 잔잔한 그”가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 곰곰 생각해 보자. 강과 산을 낀 마을로 해마다 찾아드는 “사방에 색채들 제 때깔로 타고 있을 때”의 사계(四季)는 어떠한가. 그림 같이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가 아니런가. 그것은 이 땅에 사는 우리네의 사는 기쁨이고 유일무이한 자랑거리일 것이다.
동시에 이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한다면(삶이 뭐 별거냐?) “몸 헐거워져 흥이 죄 빠져나가기 전”에 우리는 기꺼이 “한 팔 들고 한 팔은 벌리고 근육에 리듬”을 타는 왈츠나 재즈, 블루스, 댄스를 한 판 멋지게 신명나게 언제 어디서나 출 수 있을 터이다.
나는 목요일 오후, 이 글을 쓰면서 그림과 시를 통해 냇 킹 콜의 팝송 ‘LOVE‘’에 맞춰 시를 다시 읽고, 그림을 한참 보았다.
野曠天低樹 (야광천저수)
江淸月近人 (강청월근인)
“들이 넓으니 하늘이 나무에 나직하고, 강이 맑으니 달이 사람 곁에 다가선다”(맹호연, ‘宿建德江’)라고 했던가. 이 느낌, 중국 건덕강이 굳이 아니더라도 북한강가에 어디서나 저녁이 오면 이 가을에 만끽이 가능하다. 애면글면 힘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 떠나자! 도시의 악을 해독하러. 저 청정무구 자연 속. 강가에서 만나자.
◆ 참고문헌
황동규 <사는 기쁨>, 문학과지성사, 2013.
김선현 <그림의 힘>, 에이트포인트, 2020.
조원재 <방구석 미술관>, 블랙피쉬, 2018.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옮김 <여행의 기술>, 청미래, 2011.
기시미 이치로, 전경아 옮김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인플루엔셜, 2020.
안이루, 심규호 옮김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 에버리치홀딩스, 2009.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