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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정현종의 '섬'과 김홍도 '적벽야범(赤壁夜泛)-고사인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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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정현종의 '섬'과 김홍도 '적벽야범(赤壁夜泛)-고사인물도'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문제는 항상 상대방한테만 있진 않다. 내게도 있음이다. 이른바 그것을 ‘시기’라고도 하고 ‘질투’라고도 한다. 이 조각난 마음의 파편이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는 섬으로 나를 멈추게 한다. 이를 이주향 교수는 “질투는 전갈처럼 독이 있는 꼬리로 자신을 되찌른다”라고 적었다. 옳은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김홍도 ‘적벽야범(赤壁夜泛)-고사인물도’, 18세기, 비단에 담채, 국립중앙박물관.이미지 확대보기
김홍도 ‘적벽야범(赤壁夜泛)-고사인물도’, 18세기, 비단에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상우천고(尙友千古)’


천 년의 시공간을 초월 옛 사람과 벗한다, 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옛 사람을 존경하여 벗으로 교제함을 의미함이다.

음악과 시, 고전과 미술, 음주와 서예에도 발군으로 두루 능통했던 조선 후기 대표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

그는 마흔에서 쉰 사이, 책을 탐독하다 문득 흥이 오르고 책 속의 인물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웃옷을 훌훌 벗었다. 맹렬하게 일어나는 뜨거운 감정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방바닥에 털버덕 주저앉았다. 갈증을 느낀 탓에 왼 손은 곧장 호리병을 잡아챘다. 벌컥 입으로 술을 들이켰다. 나머지 오른 손은 화선지를 밀치면서 익숙한 붓을 잡아들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상우천고의 고사인물(故事人物)을 상상하면서 손이 춤춘다.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역사 속 인물을 그려냈을 것이다. 자신이 닮고자 했던 영웅의 기상을 저도 훔쳐 배우고 익히고 싶어서 그리했을 터.

이와 관련,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 특성을 냉철한 시선으로 일찍이 비평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김홍도는 그려진 대상인물들의 행위와 감정 속에 쉽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그림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데 비해, 신윤복은 어디까지나 그림 속의 인물들을 찬찬히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인물들의 감정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소 차갑게 묘사하는 대조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그들의 생애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김홍도의 생애를 언급한 자료는 부족한 대로 꽤 있어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얼마만큼 짐작되는 데 반해, 신윤복의 경우는 그 생애 역시 작품 속에 보이는 인물들의 모호한 표정과 생각만큼이나 철저하게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오주석 <단원 김홍도>, 79쪽 참조)

조선 화가 김홍도는 <적벽야범>을 그려내면서 중국 송나라 대문호 동파 소식(蘇軾, 1037 ~ 1101)의 ‘전적벽부(前赤壁賦)’라는 명문장을 황소처럼 부지런히 씹고 또 씹어서 오장육부로 되새김질했을 것이다.

마흔에서 쉰 사이에 만나는 내면 감정의 바다, ‘열정(熱情)’


시인 정현종(鄭玄宗, 1939~ )의 명시 <섬>은 아주 짧다. 단지 두 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마흔에서 쉰 사이, 송년회 때 친구들과 만나면 간혹 시낭송을 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다행이 시가 그냥 외워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난다, 2020년)를 탐독하다가 정현종의 시를 또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또 ‘우연’이었다. 황현산의 시 해설에 내가 연필로 파도처럼 밑줄을 쳤던가. 그 통찰력이 빛나는 글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섬처럼 떨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서로 만나고 생각과 감정을 서로 교환한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만나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끝까지 털어놓지 못하는 어떤 마음의 조각(필자 강조)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고독한 섬을 만들고 사람들을 고독하게 한다. 그 섬에 발을 들여놓을 수만 있다면 사람과 사람은 완전히 만날 수 있을 터인데 사람들은 거기에 가고 싶어 하면서도 쉽게 가지 못한다. (같은 책, 64쪽 참조)

그렇다. ‘저마다 끝까지 털어놓지 못하는 어떤 마음의 조각’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닿을 수 없는 경계로 ‘섬’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섬은 내 젖은 속옷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관계, 미묘한 사이의 ‘썸’으로 나타나고 끝나기도 한다. 나는 정현종의 시를 훔치어 이렇듯 내 방식으로 적어 보았다.

청춘남녀 사이엔 썸이 있다.

그 썸을 타고 싶다.

정현종의 ‘섬’은 우리 나이로 그가 갓 마흔에 만난 열정, 즉 내면 감정의 바다에 떠 있는 섬으로 난 읽힌다. 시의 화자는 끝까지 독자에게 젖은 속옷을 보여주지 않는다.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 그러한 내면 깊숙한 감정 상태의 조각을 단지 ‘섬’으로 비유하여, 열정을 감추는 듯하다. 아무튼 ‘열정(熱情)’은 인생이란 ‘일’과 주로 관련된다. 그에 반해 ‘정열(情熱)’은 연애란 감정으로 ‘사랑’에 제한이 좁혀진다. 그 누구에게나 마흔에서 쉰의 나이는 생각해 보면 가장 열정적인 때일 것이다.

그 열정이 제대로 발현이 되면 미래의 우리를 살맛나게 하지만 거꾸로 제때에 연소시키지 못한 열정은 우리를 병적으로 늙게 하고, 집착으로 감정을 낭비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혹은 너무 늦은 나이에 찾아오는 ‘썸’은 가정을 찢고 파괴할 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여 위험천만한 감정의 찌꺼기, 정열로 변질이 되어서 추(醜)할 뿐이다.

정열은 스물에서 서른 사이. 열정은 마흔에서 쉰 사이. 하여간 연애는 빠를수록 좋고 일은 나이가 늦춰질수록 진짜 우리에게 살맛이 나게 한다.

김홍도는 죽을 때(61세)까지 자신이 좋아하고 즐겼던 그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열정을 살피자면 스승 강세황이 씨앗을 심었고, 정조 8년(40세, 1784년) 안기 찰방으로 벼슬을 살면서 성장이 되었다. 60세(1804년)에 이르러서, 생애 처음으로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으로서 최고의 정점을 찍었다. 그의 성장과 성숙을 곁에서 도운 벗으로는 양반, 임금, 그리고 동료화원이자 동갑 친구인 서묵재 박유성과 유춘 이인문 등이 있었다. 또한 상우천고의 벗, 소식과 도연명 등이 단원의 흉중에 내면의 바다에서 살아 있었다.

이 밤에 배를 띄워야 그 섬에 닿는다

얼마 전 일이다. 시월의 어느 날, 초등학교 반창 친구들과 어울려 경기도 화성시 궁평항에 놀러갔다. 우리들은 모두 남자라서 세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새우를 소금구이로 해서 먹었다. 식후에 한 친구는 내게 속삭였다. 자신이 십대 후반 때,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수원에서 화성 궁평항의 친구네 집까지 놀러왔다고 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그런 얘기를 했다. 그 집이 어디냐고 묻자 친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었다.

그곳을 바라보니 단원의 그림 속 적벽의 모습과 얼추 닮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우연이….

예전엔 그곳이 모두 서해바다였다고 한다. 참고로 지금은 그곳 일대가 도로가 되었으며 육지로 변했다. 그러니까 상전벽해가 아니라 거꾸로 벽해상전이 된 셈이다. 그러면서 적벽 뒤로 친구네 시골집이 있었다고 말했다. 대략 계산해보니 40년 전(1981년)의 여름방학 때의 일이었다.

수원대 철학과 이주향 교수의 신간 <아모르파티>(맥스미디어, 2020년)에 이런 좋은 글이 보인다.

빌 어거스트 감독 '리스본행 야간열차'(2014년).이미지 확대보기
빌 어거스트 감독 '리스본행 야간열차'(2014년).


인생의 감독은 ‘우연’이다! 그 남자가 계획에도 없었던 리스본행 열차에 올라탄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그를 사로잡은 한 권의 책을 따라, 책의 작가 아마데우의 흔적을 쫓아 리스본을 헤맵니다. 우연히 지나가는 오토바이와 부딪쳐 넘어지면서, 아꼈던 안경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참으로 재수도 없지요. 그런데 그 재수 없음이 재수를 부릅니다. 새로 맞추어야 하는 안경 때문에 우연히 들른 안과에서 한 의사를 만나고, 그가 마침 아마데우의 지인과 아는 사이입니다. 의사는 갑작스러운 충동을 따라 여행하는 그의 여행길에 징검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연히!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이것이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어찌 보면 지극히 지루한 영화인데, 이상합니다. 지루한 것이 화면을 외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사유하게 만드는 매개가 됩니다. 그 남자가 읽고 있는 아마데우의 책 때문입니다. 아마데우가 쓰고 있습니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게 되지요? 아니, 어쩌면 사소하다고 우리가 무시한 어떤 순간들은 우리의 무시를 개의치 않을 만큼 당당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같은 책, 58~59쪽 참조)

이주향 교수의 글을 보고 나는 소식의 <전적벽부>라는 명문장을 원문과 대조하며 다시 보게 되었다. 미술 전문기자 문소영 작가의 <명화독서>(은행나무, 2018년)을 참고하면서. 그러면서 “청군일석화(廳君一席話), 승십년독서(勝十年讀書)”라는 중국 속담을 기억의 서랍에서 꺼내어 들었다. “그대와 우연히 나눈 대화가, 십년 동안 읽었던 책보다 낫다”라는 말이 새삼 옳구나! 또 한 번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다.

소식의 나이 47세. 중국 호북성 황주에 명승지. 적벽 아래에서 어스름 저녁에 출발하는 한 조각의 작은 배에 소식과 동승하게 되는 나그네가 있었다. 나그네 가운데 퉁소(洞簫)를 부는 사람은 우연히 소식과 깊은 이야기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다. 그런 내용이 <전적벽부>에는 적혀 있다.

퉁소 소리가 구슬퍼 원망하는 듯하고 사모하는 듯하며, 흐느껴 우는 듯하고 하소연하는 듯 하였다 한다. 이 소리를 듣고 소식은 “어찌하여 그것이 그토록 그런한가?”라고 나그네에게 질문했다. 나그네는 “달이 밝으매 별이 드물고,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 하니, 이것은 조맹덕의 시”라고 하면서 이곳이 “조조가 주유에게 곤욕을 본 곳이 아닌가?”하고 대답하였다.

참말로 일생의 영웅인 조조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하면서 곤혹스러운 심경을 토로하자 소식은 “나그네도 저 물과 달을 아는가?”하면서 “가는 것은 물과 같지만 아직 일찍 가 버린 적이 없으며, 차고 비는 것이 달과 같지만 마침내 사라지거나 커지는 일이 없으니, 장차 그 변하는 것으로부터 이것을 본다면 곧 천지도 일찍이 한순간도 그대로일 수 없고, 그 변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이것을 본다면 곧 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는 것이거늘 또 무엇을 부러워할까 보냐?”하면 응수한다.

이윽고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만은 귀에 들면 소리를 삼고, 눈에 담기면 색깔을 이루니, 취해도 금함이 없을 것이요, 써도 다함이 없을 것이다”라면서 이것은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기는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자 객이 기뻐서 웃으며 잔을 씻어 다시금 소식에게 건네는 바로 그 대목.

洗盞更酌(세잔갱작)


잔을 씻어 다시 술잔을 그대에게 올린다, 라는 뜻이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술집에서 상대방이 소주잔을 씻어 내게로 건넨 깊은 그 우애의 메시지를 잘 받아내지 못했다. 이렇듯 무식했다. 이렇듯 실수만 했다. 지난 과거의 나는 그랬다. 우연히 듣게 되는 술자리에서의 대화가 어찌 보면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공부보다 더 알차고 내용이 얼마든 풍부할 수도 있음이다.

문제는 항상 상대방한테만 있진 않다. 내게도 있음이다. 이른바 그것을 ‘시기’라고도 하고 ‘질투’라고도 한다. 이 조각난 마음의 파편이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는 섬으로 나를 멈추게 한다. 이를 이주향 교수는 “질투는 전갈처럼 독이 있는 꼬리로 자신을 되찌른다”라고 적었다. 옳은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배가 되었든, 열차가 되었든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행동하고 그에게 다가서야만 한다. 단원 김홍도는 소식의 해박한 식견을 배우고자 그림을 그렸다. 시인 정현종은 자신의 미진함을 ‘섬’으로 남겼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어려움을 이렇게 시로 우리에게 호소한 바 있다. 모든 ‘사이’는 무섭다, 라고.

모든 ‘사이’는 무섭다 / 정현종

잠과 각성 사이의 표정처럼

무서운 건 없다

그 모습처럼

참담한 건 없다

모든 ‘사이’는 무섭다

모든 ‘사이’는 참담하다

이 시는 정현종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문학과지성사, 2018년)에 보인다. 내가 잠이 든 모습, 혹은 각성한 사람의 표정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너’만이 알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당최 모르는 ‘너’는 무섭지 않다. 다만 내가 아는 ‘너’로 사이로 발전할 때, 관계는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이 들끓어서 무섭게 변할 수 있다. 참담한 경우와 마주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자기 의지를 ‘섬’으로 남겨두느냐, ‘썸’으로 우연한 기회를 만드느냐에 달렸다. 하여간 ‘그’에게 가기 위해서라면 우리 모두는 이 밤에 적벽 아래에서 배를 띄워야 한다. 놀아야 한다. 술 마셔야 한다. 이야기를 나눠야만 그 목적지(섬)에 닿을 수 있다. 어쨌거나 그 섬에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의 굳센 의지와 재수가 필요하다. 배를 띄우든, 열차에 탑승하든 간에.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이미지 확대보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문학과지성사, 2018년.

황현산 <현대시 산고>, 난다, 2020.

오주석 <단원 김홍도>, 열화당, 1998.

문소영 <명화독서>, 은행나무, 2018.

이주향 <아모르파티>, 맥스미디어, 2020.

황견 엮음, 이장우 외 옮김 <고문진보 후집>,을유문화사, 2003.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