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인 밥을
커튼을 내리고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한 번에 해결이 잘 안 된다. 나이 탓인지 두서너 번쯤, 나는 아침이 오면 해우소(解憂所), 즉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린다.
미술평론가 손철주 선생을 나는 존경한다. 손 선생은 2011년 늦봄에도 정선의 그림 <꽃 아래서 취해>를 소개하더니, 늦가을에 이르러서도 연거푸 자신의 이름을 새긴 책에다 또 소개한 바 있다. 공저 작 <다, 그림이다>(이봄, 2011년)엔 이런 글이 보인다.
“나이 탓인지 저는 이 그림의 회포가 뼛속에 스밉니다.” (같은 책, 126쪽 참조)
10년 전엔 그냥 무시했는데, 이젠 아니다. 그림(22.5×19.5㎝)이 실은 작지만 맵다. 자주 볼수록 그렇다. 그림 속 인물이 적어도 내겐 남 일 같지가 않게 감상이 보이고 느껴지며 스며든다.
내 또래인 장석남(張錫南, 1965~ ) 시인이 몇 해 전에 펴낸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 2017년)을 겨울을 맞이해 읽었다. 그러다가 정선의 그림이 보이는 ‘입춘 부근’이란 시를 발견하고는 여러 번 책장을 폈다가 접었다. 나는 그랬다.
제목은 뭐로 하지?
글쓰기 하는 사람들의 고민도 그렇지만 책을 만드는 편집자의 고심도 제목 싸움이다. 제목만 보고 덥석 집었는데 막상 집에 와서 제목에 해당하는 시를 목차에서 찾으면 보이지 않는 시집이 어디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다. 으레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유명한 책 제목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제목은 뭐로 하지?>(모멘토, 2010년)는 앙드레 버나드가 쓴 외서(外書)이다. 미국 유명 출판사 편집자로 독자에게 어떻게 하면 ‘관심 끄는 제목을 단 책’을 만들 것인가를 두고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운 일화를 책은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외서를 우리말로 옮겨 적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최재봉 한겨레신문 출판 담당 기자였다. 단순한 외서 번역만 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국내 출판계 얘기도 책에다 보탰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흥미로운 책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다음이 이를테면 그렇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영감을 얻어 쓴 이 소설의 제목으로 작가가 애초에 생각한 것은 ‘광화문 그 사내’였다. 말할 나위도 없이 광화문 네거리에 버티고 선 충무공의 동상을 염두에 둔 작명이었다. (중략) 출판사 쪽에서 그 제목이 너무 장난스럽다고 난색을 표하자 작가가 다음으로 제시한 것은 ‘칼과 길’이었다. 소설의 주제에는 잘 들어맞는 제목이었지만, 너무 심각하고 무겁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결국 좀 더 가볍고 대중적인 제목으로 낙착을 본 것이 편집자가 제안한 ‘칼의 노래’였다. (같은 책, 174쪽 참조)
소설가 김훈의 베스트셀러 <칼의 노래>의 숨은 출판 뒷이야기이다. 소설가 이문구의 <관촌수필>에 대한 에피소드 또한 웃음이 나는 대목이다. 소설 책 제목에 붙은 ‘수필’이란 말 때문에 ‘수필집을 내지 않는다’라는 출판사의 원칙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헤프닝 같은 것이 예컨대 그렇다. 다음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시집이나 소설집의 제목은 해당 시집 또는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의 제목으로 하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다. 그렇게 책 전체의 제목으로 쓰인 작품을 표제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따금씩 그런 관례를 깨는 책들이 나타난다. 시집 쪽에 그런 사례가 많은데, 그럴 경우에는 수록된 시의 제목은 아니더라도 시의 한 구절을 시집 전체 제목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같은 책, 205쪽 참조)
여기까지 읽었다면, 시인 장석남의 시집 제목이 왜 ‘입춘 부근’이 아니고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가 되었는지 독자는 비로소 감을 잡게 될 것이다. 문제는 장석남의 시 본문에는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가 맞는데 어떻게 해서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로 고쳤지, 하는 그런 의문이 들 것이다. 다시 시로 돌아가 보자.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나는 이 세 줄짜리 시에서 정선의 그림이 오버랩이 되었다. 그러면서 왜, ‘한다’가 아니고 ‘하다’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이렇다. ‘~한다’가 주는 딱딱함과 주관적인 1인칭의 단호함 보다는 ‘~하다’가 전달하는 부드럽고 객관적인 느낌을 독자에게 열어주려고 그랬다고 나는 나름 결과적인 아퀴를 짓고 말았다.
아무튼 저 석 줄의 시에서 튕기고 퍼지며 번지는 색채는 귀를 막고, 눈을 설사 감았다고 하더라도 분명코 봄인 것이다. 낮에는 봄철 꽃밭에, 밤엔 나비와 벌레가 되어 취중몽(醉中夢)으로 ‘나’를 ‘근심’의 봄 언덕으로 기어코 이끌 것이다.
근심한다는 것, 아직은 살아있다는 것!
나의 근심을 어떻게 풀 것인가. 이 물음에 옛 사람은 ‘유유두강(唯有杜康)’이라고 했다. 참고로 ‘유유두강’은 소설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단가행(短歌行)에 보인다. 오직이란 뜻의 ‘唯’라는 한자는 타인에게 말을 할 때 쓰는 것으로, 타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에게 혼자 생각만 할 때는 ‘惟’자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對酒當歌 人生幾何 (대주당가 인생기하)
譬如朝露 去日苦多 (비여조로 거일고다)
慨當以慷 憂思難忘 (개당이강 우사난망)
何以解憂 唯有杜康 (하이해우 유유두강)
술을 마주하자니 당연 노래가 나오네, 인생 살면 얼마나 되겠는가
비유하자면 아침이슬과 같은 것이 인생, 지난 과거 슬픔이야 많았지
슬퍼하고 탄식해 보아도, 근심이란 생각은 잊기가 어렵더구나
어찌해야 근심을 풀까나, 오직 두강주(술)만 있을 뿐!
이렇게 노래하듯 시를 읊고 난 다음에 이어지는 순서야 뻔하다. 다 같이 술을 비우는, ‘건배(乾杯)’가 그것이다. 다시 정선의 그림 속 주인공을 자세히 살피자. 미술품 감식안(鑑識眼)이 뛰어난 손철주 선생의 그림 해설을 따르자. 그 박식한 설명은 그림 감상을 함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재미까지 더해준다.
산 아래 푸른 이내(해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가 깔린 몽롱한 초봄의 한갓진 언덕, 오가는 이 뵈지 않고 복건을 쓴 도포자락의 노인이 혼자 노란 꽃 붉은 꽃 앞에 두고 휘청거린다. 술병과 술잔과 잔대(술잔을 받치는 데 쓰는 그릇)가 발밑에 어지럽다. 춘풍이 코끝을 간질이는데, 낮술에 취한 노인은 눈이 반이나 감겼다. 꽃향기는 술잔에 스며들고 꽃잎은 옷 위에 떨어진다. 권커니 잡거니 짝이 없어 노인은 꽃과 더불어 대작(對酌)했다. 술병 쓰러진 자리, 꺾어놓은 꽃가지 서너 개가 보인다. (손철주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20~21쪽 참조)
봄이고 밤이고 꽃은 노랗고 빨갛게 길가에 언덕으로 수북하게 피었건만 곁엔 아무도 없다. 낮술이 과했나. 다리에 힘이 풀린다. 꽃밭 앞에 폴싹 주저앉는다. 대작해 줄 사람이 없어도 내 말을 들어줄 꽃이 그 자리를 이 봄 내내 지킬 터인데 무슨 상관이랴. 그래, 꽃이여! 너 한 잔, 나 한 잔 하세. 그러다보니 빠져나간 술이 다해 붉은 술병이 바닥으로 나뒹군다. 꽃을 보면서 “우리가 몇 잔 했지?” 물으면서 엉거주춤 두 손과 반쯤 풀린 두 눈으로 셈을 해보는 듯한 포즈의 그림 속 노인은 근심은 무슨, 오히려 취기로 행복해만 보인다.
그런데 저 노인. 두 발을 뒤로 감췄다. 안간힘으로 버티는가. 꽃 밟을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말이다. 이 그림을 장석남 시인이 보았던가. 어쩜 그림 속 의경이 시상과 자꾸만 겹치고 맞물린다.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하고 고요히 화자에게 묻는 “앉아 쉬던 기러기들”을 감지하는 내공을 보라. 촉수가 여간 예민한 게 아니다. 따라서 “쫓는다”라는 행위는 역설로 “반긴다”라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커튼을 올려야 한다. 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젠 겨울이 다 지나는 ‘대한(大寒)’이 지났기 때문이다. 곧 입춘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랴. 준비해야 한다. 노랗고 붉어지는 꽃들이 만화방창(萬化方暢)하는 봄을 즐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부로 “꽃 밟을 일”이랑은 만들지 말자. 아프지 말자. 내 건강이 최고이다. 오는 봄에도 내가 먼저 건강해야 술을 마시거나 자연을 구경하는 “발이 땅에 닿”을 수가 있다.
그림과 시가 무슨 소용인가
인생에서 그림과 시가 밥이 된다고 하던, 혹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하는 사람들도 시적인 대중가요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 앞에서는 발걸음이 여간 숨죽이는 게 아니다.
대중가요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종종 그 가사가 아름다워 감명을 받을 때가 많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이건 시다”라고 말한다.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시의 전문가들도 그렇게 찬탄한다. 어쩌면 그것은 시 이상일지 모른다. 시가 이만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 적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어떤 시인이 이런 가사를 써서 용감하게 시라고 들고 나선다면 사정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어제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시라고 불렀던 전문가들이 오늘은 그 용감한 시인을 곁눈으로도 쳐다보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노래의 가사와 시에 적용하는 잣대가 다른 셈인데, 비단 문학에서만이 아니라 미술이나 음악 같은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사정은 이와 비슷할 것이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182쪽 참조)
문학평론가 고 황현산 선생의 말이다. 황현산은 또 이렇게 얘기한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던 바다.
그런가 하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시가 철학적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철학적인’이라는 말은 너무 허술하고, 모더니즘의 애매성과 선적(禪的)인 깊이가 결합된 스타일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라고 꼬집어 비평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본 장석남은 꽃과 술만 있어도 행복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정선의 그림 속 주인공을 많이 닮았다는 점에서 크게 매료되는 바이다.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생각이 없다면, 반드시 멀지 않아서 근심이 있게 마련이다(人無遠慮, 必有近憂)”라고 했다. 그 유명한 논어의 말이다. 말은 위령공이 출처다. 그렇다. “오는 봄”이 있는가 하면, “발이 땅에 닿”을 수 없는 그런 노년의 봄도 반드시 내겐 닥치는 법이다.
신형철의 지적처럼 장석남의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에서 내가 얻은 메시지는 “오는 봄”이 그리 많이 내겐 남지 않았다는 자명한 이치와 운명애라고 여겨진한다. 그러고 보니, 만해 한용운의 ‘꽃이 먼저 알아’라는 시를 여기에 옮기지 않을 수가 없다.
꽃이 먼저 알아 / 한용운
옛 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의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따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아 보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시와 장석남의 시가 나는 겸재 정선의 그림, <꽃 아래서 취해>로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눈앞에 자꾸 어른거린다. 어느새 그림 속 인물이 되어, 꽃에게 내가 뿌린 눈물이 이슬이 아니냐고 따지고 싶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동무가 되는지 묻고도 싶어진다. 역시 답과 비방은 한 가지로 통한다. 오직 ‘술’일 뿐이다.
근심은 애욕에서 생긴다고 했던가. 애정과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그게 사람인가.
봄이 오면,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는 마음의 여유가 더 많이 생겨나고 꽃 밟을 일을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건강을 잘 챙겨내야 할 것만 같다. 오는 봄엔, 꼭 친구들과 언덕에 앉아서 술 한 잔을 해야겠다. 그림의 인물이 되어서라도.
◆ 참고문헌
장석남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 2017.
손철주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현암사, 2011.
손철주·이주은 <다, 그림이다>, 이봄, 2011.
앙드레 버나드, 최재봉 옮김 <제목은 뭐로 하지?>, 모멘토, 2010.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3.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