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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정채봉 '수도원에서'와 프리드리히 '떡갈나무 숲의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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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정채봉 '수도원에서'와 프리드리히 '떡갈나무 숲의 수도원'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운(運)’이란 ‘나’가 어떻게 운전하는 것에 달려있다. 타인을 미워하고 질시하는 ‘미움’이란 왼쪽으로 내가 핸들을 돌리는 것이고, 알고 보면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 차리고 오른 쪽으로 핸들을 돌리지 않는다면 내 삶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오른 쪽이 말 그대로 옳은 것이다.

수도원에서 / 정채봉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한나절을
개울가에 앉아 있었네

개울물은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쉼도 없이 앞다투지 않고

졸졸졸

길이 열리는 만큼씩 메우며 흘러가네

미움이란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떡갈나무 숲의 수도원’,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베를린 샤를로텐부르그 성(城).이미지 확대보기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떡갈나무 숲의 수도원’,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베를린 샤를로텐부르그 성(城).


난파삼동(暖波三冬)이었던 금년 연초, 나는 두 분을 모시고 대전 역전 어느 4층 호텔 한 방에서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신 일이 있다. (이문구 <관촌수필>, 203쪽 참조)

“문열, 문구, 문팔, 문칠, 문육, 문오….”

내 나이 이십 때, 문학청년이란 낭만에 흠뻑 젖었을 그때 그 시절. 성은 ‘이’가 아닌 ‘심’으로 그냥 내버려둔다 하더라도 ‘문오’에서 멈추고는 싶었다. ‘심문오’라는 필명으로 말이다. 하지만 등단의 연은 닿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준비했던 필명을 한 차례도 지상(紙上)에 써본 역사가 없다. 아직도 아버지가 주신 성명을 그대로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난파삼동(暖波三冬), 그 시가 날 찾아왔다

청년의 내가 읽었던 소설가 이문구의 연작소설집 <관촌수필>(문학과지성사, 1977년)을 요사이 다시 읽고 있다. 세 번째 도전인 셈이다. 스물 안팎의 나이 때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았다. 밑줄도 긋지 못하고 여백에다 함부로 생각의 단상이나 베끼고픈 문장을 낙서할 수 없어 불만이었다. 서른이 되었다. 이윽고 마흔이란 숫자가 내게도 붙었다. 마흔하고 중반 언저리에 두 번째로 다시 읽었을 터이다. 쉰하고 여덟의 내 나이, 세 번째로 읽는다. 이제야 보는 맛이 조금 느껴진다.

겨울답지 않게 따뜻했던 겨울을 일러 ‘난파삼동’이라고 소설책은 설명하고 있다. 최근 들어 날씨가 꼭 그러했지 싶다. 무슨 봄날이 벌써 온 것처럼 하루아침에 각종 봄꽃이 일제히 필 것처럼 따스했다. 그러니까, 수상했다.

금요일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날씨의 온화함의 유혹을 견디지 못해 차를 몰고 무작정 서점으로 놀러갔다. 오산에서 교보문고 강남점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를 가리켰다. 느긋하게 구경하는데 문학 코너 평대에 잔뜩 올라간 정채봉 시집을 만났다. 발견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는 감격에 겨워 손을 떨면서 덥석 집었던 것 같다. 그랬을 것이다. 20년 전에 지인에게 빌려준 시집(현대문학)과는 다른 출판사의 것이지만 이게 웬 떡인가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채봉(丁埰琫, 1946~2001) 작가의 ‘수도원에서’라는 시를 매우 아끼고 좋아한다. 이 때문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시집은 약 200여권 정도. 한 권의 시집을 펼치면 보통은 내 취향에 맞는 시가 서넛 정도, 보물처럼 쏟아진다. 시편이 모두 내 마음에 쏙 드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채봉 시집은 뭔가 다르다. 다 주옥같은 시편이라고 말할까. 그랬다.

이 시집의 발문은 정호승(鄭浩承, 1950~ ) 시인이 적었다. ‘사랑과 고통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불빛’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말하자면 쏙쏙 눈에 찼다.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다음과 같다.

형이 남긴 단 한 권의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는 삶과 죽음의 세계를 넘나들었던 한 동화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의 한 결정체다. (중략) 나는 형의 시에서 인생의 사리가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본다. (중략)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할 말을 다하는, (중략) 시집을 읽으면 인간의 사랑과 고통에 대한 이해와 긍정의 불빛이 새어나와 우리의 방 안을 환히 밝힌다. (중략) 나는 정채봉 형을 단 한 번도 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중략)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같은 책, 103~105쪽 참조)

발문에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라는 글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연필 쥔 손이 부르르 흔들렸다. 그러면서 밑줄을 아주 느리게, 진심을 다해 치고 튕겨내고 있었다. 정채봉, 정호승 두 분 형님을 감히 내 마음 속 깊은 안방으로 초대해 모시고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인문학적 시읽기


그럴 때가 있다. 괜스레 속에서 부아가 들끓는 그런 일상을 우리는 무시로 마주친다. 몸소 겪게 된다.

옛말에 ‘화다수용(火多水用)’이라고 했다. 스트레스가 치밀 때는 물가(시냇가, 연못, 저수지, 강, 바다)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런 뜻으로 쓰인다.

물가는 우리 주변에 지천이다. 내 집에서 그리 먼 곳에 있진 않다. 어느 곳에 살든 물가는 항상 가까이에 있다. 가까우면 도보가 가능하다. 그게 아니면 차로 이동하면 된다. 약 30분 정도 달리면 풍광이 괜찮은 물가를 얼마든 찾을 수 있다. 찾기가 대한민국에선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화가 치미는 날엔 우리 그곳에 가자.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나절을 앉을 수 있어야 한다. 내 경우 수원성 ‘방화수류정’을 즐겨 찾는 편이다. 이게 아니면 광교저수지, 광교호수공원, 일월저수지 등을 하릴없이 무작정 간다. 가서 물가를 호젓이 보는 것이다. 그러노라면 쌓였던 화기의 스트레스가 서서히 풀린다. 미움도 원망까지 모두 풀리면서 사라진다. 정신이 맑아진다. 지치고 피곤했던 심신이 정상인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사주에 불(火)이 유독 많은 사람들이 있다. 불이 많은 사람의 특징은 대개 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말을 잘함은 상황과 시간 등에 들어맞고, 유머가 센스가 있으며, 짧게 치고 또 빠질 줄을 안다는 것이다. 강호동양학자 조용헌이 살핀 내용이 그렇다.

특히 비가 오는 날, 아름다운 정자 ‘방화수류정’에 홀로 앉아서 정채봉의 ‘수도원에서’라는 시를 꺼내들어 “미움이란/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이란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해 낭송하자면 더럽혀진 속기가 가시고 사랑할 마음이 충전이 되는 듯하다.

논어의 말이다. ‘자한(子罕)’에 등장한다.

“공자께서 개울가에 계시면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구나.”

子在川上曰 (자재천상왈)

逝者如斯夫 (서자여사부)

不舍晝夜 (불사주야)

이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정채봉 시의 화자로 거듭나는 것 같다. 그리하여 글의 행간으로 뻔질나게 드나들고 계속 왕래한다.

“나는 마흔 이전의 운은 타고날 확률이 높으나, 마흔 이후의 운이란 그 사람 자신의 ‘탓’일 확률이 크다고 생각한다.”

말은 세계적인 작가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しおのななみ, 1937~ )’가 쓴 <남자들에게>(한길사)에 등장한다.

‘운(運)’이란 ‘나’가 어떻게 운전하는 것에 달려있다. 타인을 미워하고 질시하는 ‘미움’이란 왼쪽으로 내가 핸들을 돌리는 것이고, 알고 보면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 차리고 오른 쪽으로 핸들을 돌리지 않는다면 내 삶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오른 쪽이 말 그대로 옳은 것이다.

그렇다. 살면서 더러는 혼자 있는 그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시간은 예컨대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한나절을/개울가에 앉아 있”어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개울(강, 호수, 바다)물이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쉼도 없이 앞다투지 않고/ 졸졸졸/ 길이 열리는 만큼씩”이나 닫혔던 내 마음도 차츰 열리고,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나고 상처 난 가슴까지 저절로 “메우며 흘러가”는 경지에 내가 순식간에 가닿게 되는 것이다.

미움이란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네

그렇다. 내 바라는 마음으로 인하여 미움이 잡초처럼 우거지고 자라나서 갈 길을 우리는 잃어버린다. 타인과의 우정이나 가족과의 사랑을 무릇 방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야’가 언제인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60세 이전의 나이로 좁혀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한 것처럼 남자 나이 ‘마흔 이후’에서 ‘환갑 이전’까지는 우리는 그곳을 찾아내고 가야만 한다. 그곳엔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과 가까이엔 개울가가 있다. 정채봉의 시는 우리를 그곳에 가도록 넌지시 안내한다.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정채봉의 그곳이 수도원이 가까운 개울가라면, 정호승의 그곳은 성인 공자처럼 강물에 있다.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정호승 ‘강물’ 부분)

또 하나 더, 정호승의 그곳엔 달이 보인다.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 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정호승 ‘반달’ 전문)

정채봉, 정호승의 시에선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가 언뜻 스친다. <수도원에서>라는 시와 만나면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떡갈나무 숲의 수도원>이 자꾸만 보인다. 미술사학자 이진숙의 역사적인 설명은 이렇다.

사실 이 그림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프리드리히가 이 작품을 발표하던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독일이 지배되던 상황이었다. <바닷가의 수도승>과 세트를 이루는 <떡갈나무 숲의 수도원>은 그라이프스발트 인근의 엘레나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것인데, 이 수도원은 프랑스 군대가 이 지역을 침략했을 때 요새를 짓기 위해 파괴한 장소였다. 그림 속에는 십자가 사이로 지나가는 장례 행렬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독일의 죽음을 의미한다. 물론 프리드리히는 절망만을 그리지는 않았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떡갈나무는 고대로부터 게르만족과 독일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이진숙 <시대를 훔친 미술>, 263쪽 참조)

그림의 수도원 위치는 바닷가와 인접한 곳이다. <바닷가의 수도승>이란 그림에서 수도사가 어쩌면 정채봉의 시 속의 화자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베를린 알테나치오갈레리.이미지 확대보기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베를린 알테나치오갈레리.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그림을 보면서 바이올린 연주자 노엘라 작가는 ‘고독·죽음·방랑자·겨울’이란 낱말이 연상되는 슈베르트 음악이 들린다고 책에서 말했다. 음악가이자 작가인 노엘라는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와 <겨울 풍경>이란 프리드리히 그림에 주목했지만, 나는 자꾸 한 그림이 더 좋아진다. 프리드리히가 자신의 아내인 카롤리네 봄머와 함께 달을 응시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 <달을 쳐다보는 두 남녀>가 바로 그것이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달을 쳐다보는 두 남녀’,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드레스덴 신거장 미술관.이미지 확대보기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달을 쳐다보는 두 남녀’,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드레스덴 신거장 미술관.

이 작품은 <달을 응시하는 두 남자>와 동시에 놓고 감상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두 남자도 그렇고 부부도 달을 응시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달’이 주된 배경인 두 그림엔 정호승의 ‘반달’이란 시가 조화되고 어울린다.

한국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 2014년 작).이미지 확대보기
한국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 2014년 작).


윤제균 감독의 천만관객 영화 <국제시장>(2014년 작)을 세 번쯤 거실에서 본 것 같다. 부산 국제시장을 주된 무대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부터 주인공(덕수 역, 황정민)의 짠내 인생살이에 초점을 맞춰 가족과 친구 주변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돈을 벌기 위해서 남자들은 광부로 가족 곁을 떠나는 것과 여자들은 간호사로 외화벌이를 하면서 그들끼리 우연히 만나서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한다는 스토리, 실제로 있을 법한 그림을 꼽을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호숫가를 달리는 덕수의 눈에 한 여자가 보인다. 노랫소리가 들린다. 모국어이니 오죽 잘 들렸겠는가. 그녀의 이름은 영자(김윤진)였다. 영자의 명대사!

“당신 인생인데, 그 안에 왜 당신은 없냐구요?”

가족을 위해 '나'의 꿈과 희망은 접고 희생만 하는 남편 덕수가 안타까워 아내의 입장에서 한 저 잔소리가 슬픈 음악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하기는 그래서 윤제균 감독은 덕수와 영자의 연애 장면을 달을 쳐다보는 두 남녀로 그리지 못한 것이고, 영화 속에서 정호승의 시 한 줄을 차마 외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국제시장>에서 우리 한국인이 독일에서 돈만 번 것이 아니고 독일인이 사랑하는 화가의 그림처럼 포즈를 취해 한국시를 읊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부싸움! 그 조차도 반쪽이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모르는 반달 같은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남녀가 자기 주장만 하는 오만과 편견에 빠지는 것이 혹 아닐는지. 봄이 오거든, 언 강이 풀리거든 나 혼자 개울가로 수도원을 찾아서 먼저 가볼 일이다.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이미지 확대보기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샘터, 2020.

정호승 <수선화에게>, 비채, 2015.

이문구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1977.

노엘라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나무수, 2010.

문소영 <명화독서>, 은행나무, 2018.

이진숙 <시대를 훔친 미술>, 민음사, 2015.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