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편 언덕 / 류시화
슬픔이 너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을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너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회두피안(回頭彼岸).”
앞에 시로 그 말을 풀자면 “고개를 돌리고/ (저편 언덕을) 쳐다보라”가 된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회두피안(回頭彼岸)이란 “마음의 평화와 고요와 행복이 있는 언덕이 있으니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보란 뜻”(울산불교방송, 황경환 센터장)에서 종종 설명된다. 그렇기에 시의 메시지가 부처의 명상법과 맥락이 상통한다.
류시화(1959~ ) 시인의 ‘저편 언덕’이란 시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열림원, 2015년)에 보인다. 한동안 이 시를 까맣게 잊고서 살았다. 그러다가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가 쓴 <서울 산수-옛 그림과 만나는 서울의 아름다움>(월간미술, 2017년)에서 겸재 정선의 <필운대상춘>, 송월헌 임득명의 <등고상화>라는 옛 그림을 보면서 그림 속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봄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언덕이 꼭 ‘저편 언덕’인 것처럼 다가왔다. 느껴졌다. 이것이 시와 그림의 힘이다.
자견(自遣)의 언덕, 마음챙김의 시!
저편 언덕을 조선의 선비들은 ‘필운대(弼雲臺)’라고 명칭했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고가 차지하고 있어 전망의 공간이 옹색해졌다고 한다. 옛 조선과 달리 현재는 축대를 쌓아 보수할 정도로 원형이 손상되었다 하니 그저 안타깝다. 봄꽃을 감상하는 상춘(賞春)의 최적 장소로 크게 인기를 누렸던 ‘필운대(弼雲臺)’의 언덕배기는 인왕산에 해당한다. 인왕산을 달리 ‘필운산’이라고 불렀는데 이유가 있다. 다음은 이태호 교수의 설명이다.
인왕산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 한다. ‘필(弼)’은 보필한다는 것을, ‘운(雲)’은 임금을 상징하는 구름을 의미한다. 즉 오른쪽 산에서 임금을 잘 보필하라는 뜻으로, ‘임금을 보필하는 산’이라는 의미를 그렇게 부여했다. (같은 책, 27쪽 참조)
바위에 새겨진 글씨(弼雲臺)는 서예의 행서체이다. 힘찬 모양이 반듯하고 정갈하다. 조선 선비의 기상이 붓놀림에 드러난다. 글씨는 ‘오성과 한음’의 오성 이항복 대감이 쓴 거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럴 법하다. 이항복의 호가 백사(白沙)인 것만 봐도 그렇고 또한 인근 부암동에 유명한 ‘백사실계곡’에는 실은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는, 얘기가 지금도 전설로 남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필운(弼雲)’이란 말이 꼭 ‘임금을 보필한다’로만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림 속에서는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남정네만 잔뜩 모였으므로 ‘필운우지정(弼雲雨之情 )’을 꿈꾸는 장소로서의 언덕으로 자리매김을 했을지도 혹여 모를 일이다.
여항문인 임득명(林得明, (1767~1822)의 <등고상화>는 작은(24.2×18.9) 그림이다. 보통 우리가 읽는 책 크기이다. 그럼에도 음력 2월에 봄꽃 구경을 함에 있어서 옛 그림 속으로 내가 들어가 있는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버들과 살구꽃의 조화가 황홀해 아름답다.
아래서 바라본 시선대로 필운대 언덕 능선을 살려 그렸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봄볕 가득한 풍경을 그린 셈이다. 오른편 능선은 필운대 언덕의 실제 풍경처럼 보이지만, 왼편의 능선은 실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선의 화면 구성상 일부러 좌우를 맞추어놓은 듯하다. 필운대 언덕 위에는 일곱 명의 시인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서 있고 여섯 명이 않아 있으나, (중략) 모두 갓을 쓰지 않은 점과 더불어, 여항 문학을 선도한 중인층의 자유스러움이 묻어나는 듯해 눈길을 끈다. (중략) <등고상화>에는 정조 시절 부상한 중인이나 서민층의 문예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8세기 영·정조의 시대 변화상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같은 책, 37쪽 참조)
이태호 교수의 해설이다. 해설에서 ‘사선의 화면 구성상 일부러 좌우를 맞추어놓은 듯하다’는 부분에 해당하는 그림의 왼편 능선은 실경(實景)이 아니므로 선경(仙境)의 언덕이 되는 셈이다. 임득명은 왜 그렇게 그렸던 것일까.
나는 자견(自遣)의 행위로 보고자 한다. ‘자견(自遣)’이란 한시를 쓰는 옛 사람이 종종 시제(詩題)로 삼았을 만큼 흔히 쓰인 낱말이다. 낱말의 뜻은 ‘스스로를 달래다’로 풀이할 수 있다. 이를 명사형으로 정리하자면 류시화의 ‘마음챙김’이란 낱말과 의미가 연관된다. 따라서 임득명의 그림은 일련의 등고(登高) 과정을 거쳐서 ‘저편 언덕’을 좀 보라고 일곱 명의 시객들에게 메시지를 전송한다. 하지만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등을 돌리거나 시선이 서서 시를 읊는 사람에게 가 있다. 피안(彼岸)이 바로 저 건너에 있는데도.
서 있는 저이는 무슨 시를 읊고 있을까. 나의 상상은 이렇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나은(羅隱, 833~909)의 ‘자견(自遣)’을 멋들어지게 시낭송하진 않았을까.
得即高歌失即休 (득즉고가실즉휴)
多愁多恨亦悠悠 (다수다한역유유)
今朝有酒今朝醉 (금조유주금조취)
明日愁來明日愁 (명일유수명일수)
득의하면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실의하면 뚝 그만두지요
많고 많은 슬픔과 한 영원하리니
오늘 아침 술 있으면 오늘 아침 취하고
내일 슬픔 오면 내일 슬퍼하자
왜 자작시가 아니고 하필이면 중국 당시(唐詩)냐고? 나는 언덕 꼭대기 위에 앉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시를 미처 준비하지 못하여 미안함과 죄송함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상상이 되었고 보았기 때문이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마음챙김의 시>(수오서재, 2020년)는 출판 시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가고 있다. ‘마음챙김’이 지금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달래봄’이 반드시 요구되는 미래를 맞이하고 있어서, 책 제목만 보고도 독자가 먼저 끌리는 것이 아닐까. 내 생각이 그렇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공통의 운명이 있다. 바로 삶의 모든 순간들을 경험하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영혼을 소유한 채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욕망과 결핍, 여러 번의 이사, 무서운 병 진단, 실직 등을 헤쳐 나가는 여행자(Traveling soul)이 아닌가. (중략) 시를 읽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세상을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며, 여러 색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마음챙김의 소중한 도구이다. (류시화 엮음 <마음챙김의 시>, 156쪽 참조)
그림 속의 옛 사람들도 아마 그랬지 싶다. 신분은 양반이 아닌 중인 계급에 속했지만 자기가 사는 마을(閭巷)에서 활발하게 문학 모임을 결성했다. 양반처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가면서 감상했다. 그러한 까닭에는 현실의 바닥(此岸)을 딛고자 함이다. 바닥에서 일어나서 저편 언덕(彼岸)에 내 영혼이 가닿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 마음챙김, 자견(自遣)을 하고자 해서다.
누가 시를 읽는가
“누가 시를 읽는가?”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할 사람은 시인들이다. 시인이야말로 자기가 쓴 시 말고도 남이 쓴 시를 가장 많이 읽는다. 다음은 내 보기엔 소설가들이다. 또 다음은 시인·소설가·평론가를 꿈꾸는 문학 지망생일 것이다. 문학 외에 대중들은 솔직히 말하자면 시에 관심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예술(미술, 음악, 무용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시에 대한 일상의 무관심은 옛 조선 영·정조 시대에 비해서 미비한 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다.
이런 글을 읽었다. 다음이 그것이다.
‘일상에서의 시’라는 말이 터무니없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시’와 ‘일상’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상충하여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고, 시를 찾을 수 있는 삶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듯이 느껴지니 말이다. 시인들이 그런 분리를 자초했다. (중략) 다른 이들과 시 얘기를 하다 보면 곧잘 이런 말을 듣는다. “아, 학교 다닐 때는 좀 읽었어요. 끄적거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럴 시간이 없네요.” 그러고는, ‘시인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요즘 나오는 시들은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이어진다. (프레드 사사키·돈 셰어, 신해경 옮김 <누가 시를 읽는가>, 서문 중에서)
글을 읽으면서 해외 이야기가 아닌, 꼭 국내 이야기처럼 나는 들렸다. 그럼에도 책에는 의사, 경제학자, 철학자, 가수, 철공 노동자, 방송인. 기자, 국회의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시를 읽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대한민국도 사정이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컨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류시화의 시가 만든 독자는 각계각층의 독자로 두터운 편이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짐작된다. 내 마음의 숨겨진 영혼과 심금을 찾아내서 툭툭 건들리는 식의 류시화의 시는 쉽게 대중에게 읽혀지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짐이 차별화된 특징일 것이다.
이문재 시인은 류시화의 시를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인이 만든 시, 시가 만든 시인보다 시가 만든 독자가 훨씬 더 많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류시화 시가 대체로 그렇다고 간추린 얘기다.
“슬픔이 너를 부를 때/고개를 돌리고/쳐다보라”라는 부분을 읽고서 나는 임득명의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그 슬픔에 기대라”라는 행으로 넘어가서는 슬픔이, 정호승 시인이 말한 ‘바닥’(「바닥에 대하여」)이란 시어로 경험됐고 만져졌다.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의지하지 않고 그 바닥(슬픔)에 기댈 것 같아졌다. “저편 언덕처럼/슬픔이 손짓할 때/그곳으로 걸어가라”는 부분에서는 슬픔이 임득명의 살구꽃처럼 읽혔다. 슬픔이 꽃으로 전환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라는 구절은 종교적 귀환으로 ‘나’를 구원하며 기도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저편 언덕으로 가서/너 자신에게 기대라”는 부분을 소리 내어 읽으면 가슴 밑바닥에서 용기와 지혜가 물처럼 샘솟는다. 마지막이다. “슬픔에 의지하여/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는 결정적인 한 방! 이 한 방이 슬퍼하되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들렸다. 적신호이다. 슬픔은 신호등의 녹색 같은 것이고, 절망은 신호등의 빨깐 색 같은 것이다. 그때는 내가, 그냥 잠시 멈춰야 한다. 저편 언덕,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에 보이더라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기쁘게 조우하려면.
저편 언덕, 그곳은 내가 살만한 곳인가
한때 나는, 그림에 보이는 서울 부암동 인근 지역에 세를 들어 살고 싶었다. 하지만 꿈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꿈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또 아니다. 아직도 그곳에 가면 낯설지 않은 어떤 느낌이 마음 한구석에서 생겨나고 자라난다. 그렇기에 나는 그곳이 참 좋아 연년세세로 가끔 방문하는 편이다.
집에서 겸재 정선의 <필운대상춘>과 송월헌 임득명의 <등고상화>라는 그림을 자주 쥐락펴락 책을 펼친다. 곁들여 이태호 교수가 직접 그린 <신도원의 꿈>이란 그림도 같이 보는데 올해 삼월 말이나 사월 초가 어서 오길, 간절히 기다려진다. 작년에는 친구들과 카페 ‘산모퉁이’에서 차를 마시면서 아래의 풍광을 감상했다. 올 봄엔 배화여고 필운대로 벗들과 나들이 가려고 맘먹고 있다. 코스를 조금씩 바꾸는 재미가 쏠쏠해서다.
“산에는 바라볼 만한 곳이 있고 노닐 만한 곳이 있고 살만한 곳이 있는데, 살 만한 곳이 더욱 뛰어나다(山有可望者, 有可遊者, 可居者, 可居則更勝矣)” (동기창, 변영섭 외 옮김 <화안(畵眼)>, 120쪽 참조)
그렇다. 산이 있으면 비탈진 오름의 언덕이 있다. 언덕 정상에서 바라볼 만한 경치는 관광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에 오르면 볼 수 있다. 또 가까운 지인과 친한 벗들이 예닐곱 모여 노닐 만한 언덕이 있는데, 그런 곳은 대개 유원지로 개발이 된 곳이 많다. 내가,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단독주택인데 언덕에 위치해 있다. 앞의 전망은 아파트와 기찻길이 보이므로 그림 같은 집이라고 할 수 없다. 아, 부암동 이곳마저 없다면 꽃피는 봄이 오면 어디서 선경(仙境)의 피안(彼岸)에 내가 설 수 있으랴. 부지런히 그곳을 찾는 길만이 슬픔에는 빠지되, 내가 절망에 빠지지는 않는 첩경(捷徑)의 길이 될 것이다.
음력 2월은 좀 빠른 듯하고, 음력 3월이 되면, 타이밍이 적절해 보이니 나는 기쁠 것이다.
“삼월한양성/천화주여금/수능춘독수/대차경수음”
이렇듯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시낭송 하면서 필운대와 부암동 백사실계곡 일대에서 산책하면서 나 홀로라도 노닐 것이다.
三月漢陽城
千花晝如錦
誰能春獨愁
對此徑須飮
“삼월이라 서울에는/온갖 꽃들 곱다/누가 봄날 슬픔에 젖어 있나/이곳에서 아름다운 풍광 마주하니 모름지기 마셔야하리.”
마시는 것이 술이면 어떻고 차(茶)라고 한들 또 어떠하리. ‘저편 언덕’이란 카페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나는 그곳에 가서 내 마음을 달래고 보듬어 기어이 꼭 챙길 것이다. ‘저편 언덕’을 바라보고 놀면서 아침부터 저녁 어스름까지. 늦으면 달빛을 뒤로 두고 집으로 천천히 돌아올 것이다.
맥연회수(驀然回首). “문득 고개를 돌린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던 내 연인이 저기에 홀연 보이듯이 내가 살만한 곳도 비로소 눈에 들어오고 보일 것이다.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이유이다. 그럴 때에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짠~
내가 쳐다볼 수 있는 그대가 서서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 때나 함부로 빨리 절망해서는 안 된다.
◆ 참고문헌
류시화 시선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열림원, 2015.
류시화 엮음 <마음챙김의 시>, 수오서재, 2020.
이태호 <서울 산수-옛 그림과 만나는 서울의 아름다움>, 월간미술, 2017.
프레드 사사키·돈 셰어, 신해경 옮김 <누가 시를 읽는가>, 봄날의책, 2019.
동기창, 변영섭 외 옮김 <화안(畵眼)>, 시공아트, 2004.
유병례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라>, 시와진실, 2015.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