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 오세영
산다는 것은
눈동자에 영롱한 진주 한 알을
키우는 일이다.
땀과 눈물로 일군 하늘 밭에서
별 하나를 따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를 안아
기르는 일이다.
어느 가장 어두운 날 새벽
미명(未明)의 하늘을 열고 그 새
멀리 보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손 안에 꽃 한 송이를 남몰래
가꾸는 일이다.
그 꽃 시나브로 진 뒤 빈주먹으로
향기만을 가만히 쥐어 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그래도 산다는 것이다.
일찍이 나는, 메모장(휴대폰)에 시를 저장한 바 있다. 문득 사는 게 뭔지,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찾아 읽는데 좋다. 마음의 시름이 비워지고 정화되기 때문이다.
해마다 삼월이 오면 부고(訃告)가 잦다. 봄꽃이 활짝 필 무렵까지 못 버티시고 그만 돌아가시니 안타깝다. 부모들은 해마다 삼월이 되면, “어느 가장 어두운 날 새벽/ 미명(未明)의 하늘을 열고 그 새”가 되어서 날아 소천(召天)을 하신다. 하늘이 그를 찾으신다. 올해도 벌써 1주에 한 번, 어김이 없다. 부고 알림창이 뜬다.
원고를 마감하는 중이었다. 동창회 밴드에 친구의 훤당(萱堂)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悲報)가 보였다. 느닷없이 나는 50여 년 전으로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하기에 이르렀다. 로버트 제메키스 감독이 연출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 총지휘를 맡아 아카데미상 영예를 안았던 영화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1987년 국내개봉)의 주인공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순식간에 돌아가고픈 마음이 찰나에 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나는 철-부지, 라는 생각을 쉽게 떨쳐낼 수 없다.
언제였던가. 목련이 젊은 여인의 목덜미처럼 곱게 피웠던가. 어느 수목원에서 높고 맑은 소프라노 톤의 노랫소리가 들렸던가. 박목월 시인의 ‘4월의 노래’라는 시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노래는 들어 알았으나 시라는 것은 한동안 몰랐다. 그러다가 나중에 겨우 알아챘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박목월 작시, 김순애 작곡)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 뵈었던, 친구 어머니에 대한 첫 인상은 4월의 하얀 목련을 닮아서 고귀(高貴)해만 보였다. 이것만 영상으로 그저 희미하게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박목월 시인이 추천해 시인이 된 오세영 (吳世榮, 1942~ )의 시 ‘산다는 것은’을 나는 또 메모장에서 찾아 옹알이하듯 읽었으리라.
산다는 것은 후회가 많다는 것
수십 년이 지났어도 여전이 명작이라고 할 SF 미국영화 <백 투 더 퓨처>를 두고 나와 비슷한 연배의 일본의 영화평론가 슈쿠와 준이치(1963~ )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생 마티(영원한 고등학생, 마이클 J. 폭스)는 약간 유별난 친구이자 과학자인 에멧 브라운 박사(크리스토퍼 로이드)가 스포츠카 드로라인을 개조해서 만든 타임머신을 타게 되어 30년 전의 세상으로 떠난다. 마티는 박사의 도움으로 30년 전의 세상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방법을 발견하지만 소녀 시절의 엄마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자신 때문에 변화할지도 모를 자신의 가족의 역사를 복구할 상황에 놓인다. (슈쿠와 준이치, 박미옥 옮김 <시네마 경제학>, 279쪽 참조)
이 영화의 교훈처럼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후회를 할 일이 점점 더 많아지며 늘어난다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럴 법하다. 그런 까닭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만약에 진짜 있다면야 어떻게든 탑승해서 내가 원하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만 싶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 현실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누구나 살면서 공평함을 느끼는 부분이 하나쯤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하늘의 시간으로 말하자면 ‘천명(天命)’이 된다. 천명의 엄정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다 같은 결과를 맞이한다. 누구든지 조우(遭遇)할 밖에 없다. 차별함이 없다. 오직 똑같아질 뿐이다. 이렇듯 모두 그 시간이 오면 빈손이 된다. 빈손으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마침표를 찍게 마련이다.
4연 17행의 시. 시에서 나는, 인생의 나이를 만났다. 이를테면 ‘산다는 것은/ 눈동자에 영롱한 진주 한 알을/ 키우는 일’이라는 부분에선 불혹(不惑, 40세)과 지천명(知天命, 50세)이 보였고, 조선 후기의 초상화 인물 여러 점이 겹치면서 스쳤다.
또한,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를 안아/ 기르는 일’이라는 구절과 만나면 환갑이 지나고 고희(古稀, 70세)가 넘은 나이로, 나 자신의 은퇴 이후의 삶이란 그래야 한다는 막연한 상상이 된다. 동양 산수화에 자주 보이는 은자(隱者)의 인생이 펼쳐졌다,
아무튼 서른 이후의 인생 여정에서 ‘산다는 것은/ 손 안에 꽃 한 송이를 남몰래/ 가꾸는 일’과 만나는 시간이고 여행이지 싶다. 더불어 ‘꽃 한 송이’의 의미는 곧 덕(德)을 쌓음이고 선(善)을 행함이지 싶다. 그렇게 해서 ‘그 꽃 시나브로 진 뒤 빈주먹으로/ 향기만을 가만히 쥐어 보는 일’로 삶의 마무리를 몸소 내가 해낼 수 만 있다면야 산다는 것은,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이 되지 싶다.
오세영의 시는 겉으로 보면 허무일 수 있으나, 속을 까면 낙관으로 보인다. 한의사들의 고전인 <황제내경>이란 책엔 좋은 글이 나온다. 여덟 글자이다. 이 팔자를 내가 알면 어쩌면 앞으로 인생은 많은 부분이 희망적으로 바뀔 수도 있음이다. 다음이 그것이다.
“마음이 낙관적이고 성격이 활달하면 병마가 귀찮게 하지 않는다 (正氣內存 邪不可干).”
긍정적인 에너지를 체내로 흡수하라는 그런 가르침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부의 백년해로 또한 그 의미는,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와 더불어 같이 늙어감 (執子之手, 與子偕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덥석 남의 손을 잡는다는 것, 그것은 부정의 손짓이 아니다. ‘너’를 내가 긍정하는 스킨십이다. 이점에서 ‘산다는 것은/ 그래도 산다는 것’으로 종결은 낙관적인 마음이 깃든 눈빛으로 최종 마무리,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된다.
에드워드 호퍼의 햇빛 속의 여인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햇빛 속의 여인>이란 그림을 보자. 호퍼는 미국인들의 삶의 이면에 감춰진 고독을 즐겨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최영미 시인이 쓴 <화가의 우연한 시선>(은행나무, 2013년)에 이런 글이 나온다. 다음이 그것이다.
호퍼가 죽기 6년 전에 그린 <햇빛 속의 여인>에게도 꿈이 있던가. 분위기로 봐서 가정집이 아니라 호텔방인 것 같다. 벌거벗은 중년의 여인이 한 손에 담배를 물고 빛 속에 서 있다. 열려진 유리창 밖으로 산등성이가 보이고 또 다른 창의 커튼자락이 살며시 바람에 나부낀다. 마치 누군가 그녀를 엿보고 있기라도 하듯이. 그러나 여자는 그 누군가의 눈을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창을 향해 두발을 벌리고 서 있다.
여인은 배경의 직선들에 포위된 유일한 곡선이며, 사물들에 포위된 유일한 생명체이다. 드가의 영향으로 호퍼는 문명과 자연을 각각 직선과 곡선으로 대비시키는 구성을 즐겼다. 벽과 창 그리고 액자처럼 인간의 편리를 목적으로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은 대개 네모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문명을 이루는 딱딱한 선들이 자연의 부드러운 곡선을 위협하는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약간의 과장이 필요했다. (중략) 그녀는 마치 하나의 가구처럼, 뿌리뽑힌 나무토막처럼 생명을 잃고 바닥에 붙박여 있다. 그래서 더 고독해 보이는 실존이 현대를 사는 여인답게 싸늘하게 재현되었다. (같은 책, 225쪽 참조)
나는 최영미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그만 오세영 시인의 ‘산다는 것은’이란 시로, 그러니까 삼천포로 빠진 셈이다. 벌거벗은 중년의 여인이 고독해 보이지만 ‘햇빛’으로 다시 일어선 것은 아닌가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났다. 다시 말해, ‘그래도 산다’는 결론을 내린 그리하여 ‘여자는 그 누군가의 눈을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두 발을 벌리고 서 있’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여인의 봉긋한 두 가슴은 새 한 마리를 충분히 안을 만큼 아직 젊다.
그녀는 그 빛의 사각형 밖으로 살아나 걸어나올 수 있을까? (같은 책, 229쪽 참조)
최영미 시인은 ‘엿보는 자는 결코 알 수 없으리’라고 했지만, 나는 어쩐지 밖으로 그녀가 걸어나올 것만 같아 보였다. 햇빛이 담배가 커튼이 열린 산이 그리고 검정색 높은 하이힐 구두가 화면 밖의 숨겨진 원피스를 입고 화사하게 외출로 등장할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세영의 시와 호퍼의 그림을 하이브리드로 산다는 관점에서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되어야 한다고 시도해 본 셈이다.
조선 후기 초상화-눈동자에 영롱한 진주 한 알
국내 최고의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가 쓴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조선 후기의 초상화>(마로니에북스, 2016년)란 책에서 나는 오세영 시인이 말한 ‘눈동자에 영롱한 진주 한 알’을 <강세황 자화상>에서 발견한다. 자화상 그림부터 보자. 강세황의 두 눈에 어린 영롱한 진주 같은 두 눈동자가 단박에 보일 것이다.
이태호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조선시대 문사 가운데 강세황만큼 여러 점의 초상화를 남긴 이도 드물다. (중략) 강세황은 60세까지 재야 문인으로 살다가 뒤늦게 영릉참봉(英陵參奉)으로 시작해 한성부판윤에 이르도록 노년을 관료로 지냈다. 그리고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로 김홍도 같은 화가를 키우는 등 당대 화단과 예림(藝林)의 총수로 일컬어질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문인화가이다. (중략) 70세에 그린 전신상으로 편하게 앉은 좌상의 <강세황 자화상>은 “마음은 산림에 있고 이름은 조적(朝籍), 곧 관직에 두고 있다”라고 언급한 자찬문에 밝혀듯이 관모인 오사모를 쓴 채 평상복의 도포 차림을 그린 것이다. 자신의 현재 처지와 심중을 적절히 희화(戱畵)한 자화상으로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선례가 없는 새로운 형식을 보여준다. (같은 책, 286~288쪽 참조)
영롱한 진주 한 알 같은 눈빛의 눈동자는 강세황 초상화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조선 후기 초상화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비결이 평소 책을 읽는 습관을 지닌 눈에 자연히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시와 그림을 평소에 습관처럼 보고 관람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눈동자를 살펴보면 섞은 동태 눈깔을 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책을 가까이 하려는 그 이유로서 필요한 조건이다.
조선의 선비,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일대기를 다룬 책들과 만나면 나는 그가 평생을 낙관적인 태도로 시종일관 살았다, 라는 점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 산다는 것은, 그래도 비관(悲觀)의 태도로 소일(消日)하는 것보다 낙관(樂觀)의 자세로 촌음(寸陰)을 아끼는 것이 낫다. 그래서 오세영의 시는 우리에게 무게와 깊이를 긍정으로 전달한다.
오세영의 시 한 편, 그 일부를 여기에 더 소개한다.
피리 / 오세영
푸르른 봄날 당신이
강언덕에 앉아 피리를 불면
나는 아지랑이 되어
이 세상의 꽃봉오리들을 터트리고
쓸쓸한 가을날 당신이
산언덕에 앉아서 피리를 불면
나는 갈바람이 되어
이 지상의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고
나는 꿈꾸는 허공,
텅 빈 구멍
당신의 피리인지 모릅니다.
아니 당신의 피리입니다.
<피리>를 고 황현산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해설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음악으로서의 피리 소리는 시를 넘어선 시, 시의 영원한 형식이다. (중략) 시인의 “당신의 피리” 되기, 그것은 자아를 무산하고 어떤 비개성의 존재로 되기이다. 시인은 시 쓰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무화한다. 나는 당신의 시를 받아들이고 당신의 시를 실천하는 존재이자 비존재이다. 그러나 오래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인데, 시인이 비개성적 존재로 된다는 것은 어떤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영감을 무의식적으로 기록하는 자동 기계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개성의 포기가 아니라, 도리어 절대적 개성으로 되기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존재할 절대적인 장소로 삼고, 당신의 모든 선의와 능력이 발현될 소질로 삼는 것이다. (같은 책, 201쪽 참조)
나이가 들수록 욕심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텅 빈 구멍/ 당신의 피리’가 놓여진다. ‘푸르른 봄날 당신이/ 강언덕에 앉아’서 4월에 피어나는 온갖 꽃을 보고 푸른 자연의 산수(山水), 즉 네모난 방에서 탈출하여 만나야 하는 인생은 그런 것이다. 서른은 빠르고 예순은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95세로 소천하신 내 친구의 어머니는 미명(未明)의 하늘을 열고 훨훨 한 마리 새처럼 아마도 삼월을 비상(飛翔)하여, 이윽고 사월에 사랑하는 아들에게 피리를 툭, 던져 주실 것이다.
◆ 참고문헌
오세영 <마른하늘에서 치는 박수소리>, 민음사, 2012.
황현산 <말과 시간의 깊이>, 문학과지성사, 2002.
최영미 <화가의 우연한 시선>, 은행나무, 2013.
이태호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조선 후기의 초상화>, 마로니에북스, 2016.
슈쿠와 준이치, 박미옥 옮김 <시네마 경제학>, 휴먼앤북스. 2010.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