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서야 멀리 갈 수 있다.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라면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난 27일 향년 92세 나이로 별세한 고(故) 신춘호 농심 회장의 말이다. 신 회장은 한국인의 매운맛으로 세계를 울린 '라면왕'으로 불린다. 그는 1965년 창업해 신라면, 짜파게티, 새우깡 등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제품을 개발한 주인공이다.
1930년 12월 1일 울산광역시에서 태어난 신춘호 회장은 대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을 도와 제과 사업을 시작했으나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했다. 신춘호 회장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신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한다”면서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 회장은 '한국적인 맛'이라는 브랜드 철학을 확고하게 유지해왔다.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두고 농심만의 한국인 입맛에 맞는 제품 개발을 위해 힘썼다. 농심은 소고기 육수를 사용한 '소고기 라면'으로 라면 시장에 변화를 일으켰고 이후 '너구리' '육개장 사발면' '안성탕면' '짜파게티' '신라면' 등 히트 상품을 연이어 출시하며 국내 1위 라면 기업으로 올라섰다.
신춘호 회장의 역작인 신라면은 현재 전 세계 100여 국에 수출돼 한국 식품의 외교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신 회장은 해외진출 초기부터 신라면의 세계화를 꿈꿨다. 농심은 미국 시장에서 '한국의 맛'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현지 제품을 모방하지 않고 농심의 맛 그대로 시장에 선보였다. 그는 미국에 이미 진출해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 라면과 유사한 제품을 출시하면 단기적인 매출을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농심의 브랜드가 사라지리라 판단했다.
그 결과, 농심이 해외 매출은 지난해 9억 9000만 달러(1조 1261억 원)에 이르며 세계 5위 라면 기업으로 도약했다. 미국 시장에 법인을 세우고 24년 만에 주류시장(백인·흑인 중심의 미국 현지 소비자) 매출이 아시안 시장을 앞질렀고, 2019년 기준 주류시장 점유율이 62%로 아시안 시장(38%)을 압도했다. 신 회장은 2018년 중국의 인민일보가 신라면을 '중국인이 사랑하는 한국 명품'으로 선정했을 때,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가 신라면 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했을 때,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고 전해진다.
고 신춘호 회장의 영결식은 30일 오전 5시 빈소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 후 고인의 서울 용산구 자택을 들른 후 동작구 신대방동 농심 본사 도착, 유족과 농심 임직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영결식에는 고인의 장남인 신동원 농심 부회장을 비롯해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 신현주 농심기획 부회장,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 부인인 차녀 신윤경 씨, 고인의 동생인 신준호 푸르밀 회장 등 유가족과 임직원이 참석했다.
56년간 농부의 마음으로 제품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품질 제일과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강조한 신춘호 농심 회장은 'K라면' 'K푸드'의 자존심을 후세에 맡기고 유가족과 임직원의 애도 속에 경남 밀양 선영 곁서 영면에 들어갔다.
연희진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miro@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