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어느 지역에 거주하든 관계없이 낙태권을 헌법상 권리로 보장한 미국 대법원의 결정이 최근 열린 위헌법률 심판을 통해 49년 만에 뒤집힌 것은 단순히 낙태할 권리를 둘러싼 사회 문제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 경제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낙태를 희망하는 직장인들의 근무지가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주에 속할 경우 낙태가 합법적인 주로 이동해 시술을 받지 않는 한 낙태를 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 노동시장의 경색 문제가 아직 풀리지 않고 있어 구인대란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주에서 낙태 시술을 하고자 하는 직원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는 문제가 인재 관리와 인력 채용 측면에서 미국 기업들 사이에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특히 기업하기에 좋은 곳을 찾아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를 등지고 텍사스주 오스틴으로 향하던 업체들의 행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다.
◇개별 주 차원에서 낙태 금지 가능해져
이는 지난 1973년 연방대법원이 내린 여성에 대한 낙태권 보장 판결로 임신 첫 3개월간 낙태권이 완전히 보장돼왔던 것을 번복한 것으로 앞으로 개별 주에서 낙태를 중단시키는 입법을 할 수 있는 길이 열었다.
이에 따라 공화당 주지사가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보수적인 성향의 주에서 이같은 입법 조치가 잇따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나오기 무섭게 켄터키주, 루이지애나주, 사우스다코타주를 비롯해 최소 7개 주에서 낙태를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하겠다는 입장을 민첩하게 밝히고 나섰다.
◇실리콘밸리→오스틴으로 향하던 기업들 발걸음에 제동 가능성
미국 연방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IT 업체들을 중심으로 이주 바람이 불면서 미국 첨단산업의 중심지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가 퇴조하고 텍사스주 오스틴이 새로운 기술 및 혁신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흐름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글로벌 컴퓨팅업체이자 실리콘밸리의 터줏대감격인 HP, 기업용 소프트웨업체 오라클에 이어 세계 최대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까지 오스틴으로 근거지를 옮겨가면서 미국 IT 산업의 무게중심이 바뀌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개별 주에서 낙태를 규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오스틴으로 향하던 기업들의 발걸음을 느리게 할 수 있다는 것.
미국 투자 전문매체 더스트리트에 따르면 텍사스주에서는 이미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해 왔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로 낙태 자체를 전면 금지하고 나설 가능성이 커졌다.
기업을 하기에는 매우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 많은 기업들이 텍사스주로 몰리고 있지만 낙태를 비롯한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관해서는 텍사스주가 매우 보수적인 지역이기 때문이다.
더스트리트는 “텍사스주로 근거지를 옮겼거나 옮길 예정인 기업들 입장에서는 텍사스주의 유리한 기업 환경을 최대한 누리는 가운데 임직원 및 임직원 가족들의 낙태권을 어떤 식으로든 배려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앞으로 숙제가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라는게 문제.
더스트리트에 따르면 이들 기업 입장에서는 낙태가 가능한 주로 가서 시술을 받는 비용을 부담할지에 대해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일뿐 아니라 비용 부담을 회사에서 해준다 해도 굳이 다른 주로 가서 시술을 받아야하는 상황이 임직원들 입장에서는 번거롭고 달가운 일이 아니라는 것.
낙태를 희망하는 임직원이 비용을 보전 받으려면 회사에 알려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민감한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문제도 발생할 우려도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 대기업 중심 발빠른 대응
미국 재계에서도 이 판결을 예상한 대기업을 중심으로 발빠른 조치를 내놓고 있다.
미국 굴지의 금융기업 시티그룹과 기업용 소프트웨어업체 세일즈포스 등이 가장 먼저 낙태를 위해 낙태가 가능한 주에서 직원들이 낙태 시술을 받는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세계 최대 소프트웨업업체 마이크로소프트, 세계 최대 전자업체 애플,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의 모기업인 메타플랫폼스, 미국 최대 차량공유업체 우버, 세계 최대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넷플릭스 등도 임직원의 합법적인 낙태 시술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방침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