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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철학의 부재'가 낳은 한국 게임업계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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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철학의 부재'가 낳은 한국 게임업계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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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원용 기자

'포켓몬 고'를 개발한 나이언틱의 존 행키(John Hanke) 대표가 최근 국내 미디어를 상대로 첫 오프라인 기자회견을 열었다. 포켓몬 고는 세계적으로 7년 넘게 가족 게임으로 각광받고 있는 글로벌 성공작이다.

나이언틱은 현재 위치 기반 증강현실(AR) 기술 분야 리딩 기업으로 손꼽힌다. 포켓몬 고 외에도 최근 '몬스터 헌터(몬헌) 나우'로 흥행에 성공하며 게임 마니아들에게도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나이언틱에 앞서 메타 플랫폼스의 마크 저커버그 대표가 삼성전자·LG전자 등을 방문한 만큼, 국내 기업들과의 파트너십 여부에 대해 관심을 보인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존 행키 대표가 회견에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회사의 AR 기술도, 포켓몬 고와 몬헌 나우 등 대표작도, 한국 기업과의 파트너십도 아닌 '외로움이 현대 사회의 커다란 문제'라는 철학적 메시지였다.

현대 사회는 '고립의 시대', '관계 단절의 시대'라는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나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만 해도 지난 10년 동안 1인 가구 수가 전체 가구 대비 비중이 꾸준히 증가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국의 1인 가구 수는 750만 가구를 돌파했다. 전체 가구의 34.5%가 1인 가구다.

고립의 시대가 온 원인으로는 사회의 선진화에 따른 필연적인 탈(脫)집단화, 개인주의 확산 외에도 코로나19의 확산이 손꼽힌다. 이와 더불어 비디오게임과 같은 1인 단위 취미 역시 주요 원인으로 비판받곤 한다. "그렇게 게임만 하니까 친구가 없지"라는 말은 업계인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게임 업계인으로서 불편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존 행키 대표는 "소셜미디어와 게임을 비롯한 인터넷 콘텐츠가 현대 사회의 외로움을 확산시키는 이유 중 하나"라며 이를 스스럼없이 인정했다. 이와 동시에 "게임은 야외 활동의 감소, 외로움의 확산이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도 될 수 있다"는 반론도 제시했다.

나이언틱의 게임 철학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혼자 즐겨도 재밌지만 함께 즐길 때 더욱 재미있는 게임. 위치 기반 AR 기술을 사람들의 움직임, 만남으로 연결시키는 주요 시스템. 포켓몬 고와 몬헌 나우는 IP와 핵심 콘텐츠 면에선 다르지만 나이언틱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실제로 존 행키 대표는 '외로움의 해결'이라는 어젠다와 더불어 회사의 목표로 '스트레스를 줄이고 행복을 제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부모와 자식, 조부모와 손주, 친구와 친구, 나아가 국경을 허물고 다양한 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고 우정을 쌓아 나가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현장에 함께 했던 동료 기자 역시 이에 공감하는 듯 행키 대표와의 면담에서 "포켓몬 고 덕분에 나이를 먹으며 멀어지던 친구들과 다시 함께하게 됐다"며 반색을 표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본 기자 주변에도 포켓몬 고, 몬헌 나우 등을 통해 가족·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든 이들이 적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2016년 7월 세계 시장에, 이듬해 1월 한국에 출시된 포켓몬 고가 7년이 흐른 최근까지도 세계 각국 모바일 게임 월간활성이용자(MAU) 수 최상위권에 머무르는 원동력이 바로 이러한 게임 철학과 이에 다수의 게이머들이 공감한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시장에서 포켓몬 고와 함께 앱 마켓 최상위권에 머무르는 게임들을 살펴보았다. 핀란드의 캐주얼 게임 '브롤스타즈'. 미국의 샌드박스형 게임 '로블록스'와 '마인크래프트'. 튀르키예의 퍼즐 게임 '로얄 매치'까지. 매출 순위에선 톱5를 두고 다투는 국산 게임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이용자 수 순위에선 톱5 모두 외산 게임에 빼앗긴 채 '전멸'했다.

돌이켜 보면 지난 몇 해 동안 한국 게임업계는 '철학 부재'의 시기를 겪었다. 상장사로서 매출을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라는 미명하에 '게임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겠다', '게이머들에게 어떤 행복감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단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BM)을 갖춘 게임을 내놓는 데 급급했다.

이 과정에서 게임사들의 핵심 개발진과 정상급 3D 그래픽 기술 대부분은 '검증된 장르'인 MMORPG 개발에 투입됐다. 그마저도 MMORPG라는 장르 안에서 혁신성을 내세우기보단 공성전 등 길드 단위 경쟁 과정에서 이용자들의 과금이 발생하는 '리니지 라이크'의 문법을 답습한 경우가 상당수였다. 이 때문에 리니지의 주인 엔씨소프트(NC)가 저작권 분쟁에 나서는 등 국산 게임 간 선의의 경쟁이 아닌 '법정 다툼'마저 벌어지고 있다.

국산 게임의 철학 부재는 외산 게임, 특히 게임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중국발 양산형 게임'들의 약진이라는 뼈아픈 결과로 이어졌다. 확률형 아이템 3000뽑기를 강조한 '버섯커 키우기', 하이퍼 캐주얼 게임의 탈을 쓴 MMO 전략 게임 '라스트 워: 서바이벌'이 유수의 국산 MMORPG들을 꺾고 구글 매출 최상위권에 오른 것이 한국 게임업계의 현주소다.

이 가운데 MMORPG란 장르에서 탈피해 게임의 재미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담은 국산 게임들이 지난해 좋은 성과를 거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모두가 아는 피노키오 이야기를 잔혹동화로 재해석해 "거짓말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는 아이러니한 주제를 다룬 네오위즈의 'P의 거짓'. '바다는 새로운 던전'이라는 표어로 게이머들의 모험심을 자극한 넥슨의 '데이브 더 다이버'. 이들은 패키지 게임으로서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지난해 대한민국 게임대상과 최우수상을 나란히 수상했다.

게임업계에 위기가 닥쳤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주요 게임사들이 연달아 대표 교체에 나섰고 위기 극복, 효율 경영을 외치는 곳도 적지 않다. 효율 경영에 집중하다 보면 또다시 게임 소비자를 위한 본질적 고민은 뒷전이 되고, 게임업계 전반의 근본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어려울수록 근본으로 돌아가라." 누가 이 말의 주인인지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경영인이 강조한 말이다. 게임의 근본은 놀이, 즉 소비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 있다. 이 게임이 이용자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는가, 그것이 지금의 게이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더욱 활성화되길 기원한다.


이원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wony92k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