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태그플레이션은 경기 둔화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미국 경제를 장기 침체로 몰아넣었던 악순환과 유사한 조짐이 최근 보이고 있다는 얘기다.
◇ 관세 인상, 기업 투자 위축과 물가 상승 동시 유발
5일(이하 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기업들의 생산 비용을 증가시키고 이로 인해 투자 심리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레이 패리스 프루덴셜 PLC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WSJ와 한 인터뷰에서 "관세 인상은 기업들의 투자 계획을 뒤흔들며 이는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할 뿐만 아니라 가계 실질소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미국 경제는 고용과 임금 증가세 둔화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며 "이 시점에서 물가 상승까지 겹치면 소비 심리가 크게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기업들은 벌써부터 가격 인상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 가전제품 소매업체 베스트 바이는 주요 제품을 중국과 멕시코에서 수입하고 있다. 코리 배리 베스트 바이 최고경영자(CEO)는 "우리의 공급업체들이 관세 부담을 소매업체와 소비자에게 전가할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 소비자들은 전반적인 가격 상승을 체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우려가 반영되면서 베스트 바이는 최근 주가가 13% 급락하는 등 시장에서도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식료품 시장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감지된다. 뉴욕 로체스터에 본사를 둔 식품업체 브러더스 인터내셔널 푸드 홀딩스는 망고와 아보카도를 멕시코에서 수입해 가공품을 제조하고 있다. 이 회사의 잭 휘티어 최고운영책임자(COO)는 "관세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선 고객사에 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지 않는다면 수익성이 악화될 것"이라며 "이에 따라 소비자들도 더 높은 가격을 부담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연준, 딜레마 직면…‘인플레이션 vs 경기 침체’
WSJ에 따르면 미 연방준비제도도 이러한 관세 조치가 가져올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 리스크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존 윌리엄스 총재는 "관세가 소비자 물가에 빠르게 반영될 가능성이 크며, 이에 따라 올해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높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의 알베르토 무살렘 총재 역시 "노동 시장이 둔화되는 동시에 물가가 상승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연준은 매우 어려운 선택에 직면할 것"이라며 "이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유사한 흐름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당시 연준이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급격히 인상했다가 경기 침체로 인해 다시 금리를 낮추는 ‘스톱-앤드-고(stop-and-go)’ 정책을 반복하면서 경제 혼란을 키운 사례를 언급했다.
현재 연준은 기준금리를 5.25~5.50%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지만 트럼프발 관세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경우 추가 금리 인상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다. 반면, 경기 침체 조짐이 뚜렷해질 경우 금리 인하가 필요할 수도 있어 정책 결정이 한층 어려워질 전망이다. 시카고 연방준비은행의 오스탄 굴스비 총재는 "관세 인상으로 발생하는 물가 충격이 ‘일시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쉽게 가져선 안 된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당시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과소평가한 전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소비자 부담 가중…연간 가계 추가 비용 최대 1000달러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관세 인상이 미국 가계의 부담을 증가시켜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 보스턴 연방준비은행 연구진은 "캐나다·멕시코산 제품에 25%, 중국산 제품에 10%의 추가 관세가 부과되면 미국의 핵심 소비재 물가가 최소 0.5~0.8%포인트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와 함께 미국 가계는 연평균 1000달러(약 130만원)의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저소득층 가계는 생활필수품 가격이 상승할 경우 재정적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액세스 매크로의 팀 마헤디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소득이 낮을수록 소비 지출에서 필수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관세 인상이 가계에 미치는 영향은 불균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소득 하위 20% 계층의 가처분소득 감소 폭이 가장 클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미국 내 물가 상승과 소비 둔화 조짐이 뚜렷해지면서 시장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관세 인상이 ‘일시적인 충격’에 그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 철회를 검토하더라도 이미 시장에 미친 영향과 기업들의 가격 정책 변화가 단기간 내에 되돌려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