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은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다. 미국 유학 시절 추수감사절은 그야말로 공포의 순간이었다. 학교 기숙사가 일주일씩 문을 닫는다. 객지 생활을 하는 유학생들로서는 숙식할 공간을 졸지에 잃게 되는 것이다. 친구의 자취방에 간신히 빌붙어 연명한다고 해도 끼니를 때우기가 여의치 않다. 거의 모든 가게가 일제히 문을 닫기 때문에 식재료를 구할 수 없다. 레스토랑도 모두 셧다운이다. 추수감사절에는 미국 사회가 올 스톱이 된다.
추수감사절 행사는 1621년 식민 지배를 받던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서 있었던 만찬에서 유래했다. 1620년 9월 15일 102명의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플리머스항(港)을 출발해 미국으로 향했다. 66일의 항해 끝에 12월 21일 매사추세츠주(州) 연안에 도착했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미국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다. 당시 청교도들이 고향의 향수를 담아 출발한 영국 항구 이름과 같은 플리머스로 명명한 것이다. 그때 청교도들이 타고 온 배가 바로 메이플라워호다.
신대륙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때 도움을 준 인디언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다. 식민지 개척자들과 왐파노그(Wampanoag) 인디언 부족은 1621년 가을 추수를 끝낸 후 같이 모여서 만찬을 즐겼다. 이것이 영국의 식민지 개척자와 미 대륙 토착 원주민 간의 우정과 협력의 상징이 된 추수감사절의 시작이다.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요리로는 칠면조 고기, 고기 국물, 으깬 감자, 그리고 크랜베리 소스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최초의 추수감사절 메뉴는 사슴 고기와 야생 닭고기로 구성된 조촐한 것이었다.
매사추세츠 찰스턴타운의 지방의회에서는 1676년 6월 20일 역사상 처음으로 ‘추수감사절 선언서’를 발표하고 그해 6월 29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정했다. 1789년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지정하자는 의견을 개진했으나 토머스 제퍼슨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추수감사절이 합법적인 국경일이 된 것은 1941년 국회가 추수감사절을 11월 넷째 주 목요일로 재승인한 후의 일이다.
추수감사절 이튿날에는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이 이어진다. 미국 소매업 연간 매출의 20%가 이 기간에 팔린다. 미국 유통업계는 블랙 프라이데이를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쇼핑 철을 알리는 신호로 여긴다. 이 시기에 맞춰 소매업 할인 판매가 집중된다. 도심에는 쇼핑백 물결이 흘러넘친다. 블랙 프라이데이를 기해 대대적인 할인 판매 행사를 시작한다. 2005년에는 ‘사이버 먼데이(Cyber Monday)’까지 등장했다. 영국에서도 연휴 뒤 온라인 쇼핑이 늘어나는 ‘메가 먼데이(Mega Monday)’라는 말이 생겨났다.
추수감사절을 블랙 프라이데이로 연결시킨 아이디어는 메이시스 백화점이 냈다. 메이시스는 1924년부터 뉴욕 등 전국 각지에서 추수감사절 퍼레이드(Macy's Thanksgiving Day Parade)를 열었다. 초기 퍼레이드는 백화점을 돌며 진행됐다. 퍼레이드를 보러 나온 사람들에게 대규모 바겐세일을 하면서 블랙 프라이데이가 생겨났다.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말은 많은 소비자들이 본격적으로 쇼핑을 시작함으로써 회계장부가 흑자(黑字)로 기록되는 날이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나왔다. 법정 공휴일은 아니지만 엄청난 인파가 상점을 찾는다. 상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 판매를 위해 일주일 전쯤부터 상점을 장식한다. 검은 금요일이 되면 상인들은 일찍이 오전 5시 전후에 문을 열고 손님을 끌기 위해 저가품이나 특매품을 내놓는다.
미국에서는 블랙 프라이데이 매출이 소비 경기를 가늠하는 대표적인 지표가 돼 있다. 소비가 GDP의 75% 이상을 감당하는 미국에서 블랙 프라이데이 매출은 향후 경기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최대 세일 시즌을 맞는 유통업체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금리 인상이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소비 둔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이 비디오게임 등 재량품에서 식료품을 비롯한 필수품으로 이동하고 있는 점도 소비 침체 우려를 낳았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의 존 데이비드 레이니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소비자들이 10월 말부터 식료품과 생필품에 대한 소비도 줄이기 시작했다”며 “우리는 4분기에 대해 더 조심스러워졌다”고 덧붙였다. 더그 맥밀런 월마트 최고경영자(CEO)는 아예 미국의 디플레이션을 경고하며 “우리는 식품과 소모품 가격이 향후 몇 주, 몇 달 내 하락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형 소매업체인 타깃 역시 소비 둔화에 우려를 표했다. 타깃의 지난 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가량 감소했다. 크리스티나 헤닝턴 타깃 최고성장책임자(CGO)는 “소비자들이 고금리와 학자금 대출 상환 등 새로운 역풍에 직면했다”며 “이들이 중첩된 경제적 압박을 느끼면서 임의 소비재의 판매가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제지표에서도 소비 둔화 조짐이 확인되고 있다. 미국의 지난달 소매판매는 7050억 달러로 전월 대비 0.1% 감소했다. 월간 소매판매가 줄어든 것은 3월 이후 7개월 만에 처음이다. 자동차·가구 등 대형 내구재 판매가 감소한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미시간대가 집계한 11월 소비자심리지수도 전월 대비 5.3% 하락하며 소비 심리가 약화하고 있음을 보였다.
디플레가 오고 있다는 월마트의 경고가 특히 마음에 걸린다. 정말로 경기 침체가 오고 있는 것일까?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의 매출과 소비 패턴을 정밀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