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산업이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연평균 7% 이상의 성장세를 보이며 2023년 1.5조 달러 규모로 성장한 글로벌 제약시장이 미중 갈등으로 인한 가치사슬 재구축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그동안 글로벌 제약산업은 연구개발(R&D)과 생산의 효율적 국제 분업을 통해 성장해왔다.
그러나, 2032년 본격 시행을 앞둔 미국의 바이오시큐어법(Biosecure Act) 추진으로 인해 생산기지 재배치가 불가피해졌다고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미국 생명공학혁신기구(BIO)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제약·바이오기업의 약 80%가 중국 기업과 계약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우시앱텍(WuXi AppTec)과 우시바이오로직스(WuXi Biologics) 등 중국 기업들은 수년간 정부 지원을 받으며 전문성과 인프라를 구축해 글로벌 제약산업의 핵심 파트너로 성장했다. 이들은 연간 200억 달러 규모의 임브루비카, 젬펄리 등 주요 항암제의 원료 생산을 담당하고 있다.
바이오시큐어법은 2024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며, 미국 정부 자금이나 계약을 받는 기업이 우시앱텍 등 지정된 중국 기업과 거래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게 된다.
이에 아스트라제네카, 아미쿠스테라퓨틱스 등 대형 제약사부터 중소 바이오기업까지 생산기지 이전을 서두르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사 맥킨지는 향후 5년간 약 500억 달러 규모의 생산시설 재배치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가치사슬 재편은 의약품 산업 전반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대체 생산시설 확보와 신규 파트너십 구축에 기업당 평균 2~3년의 시간과 수억 달러의 비용이 소요될 전망이다. 이는 신약 개발 속도 저하와 의약품 가격 15~20%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 의약 전문가는 분석했다.
더불어 이번 생산기지 재배치는 글로벌 제약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연간 1,450억 달러 규모의 세계 2위 의약품 시장이자 급속한 고령화로 2030년까지 연평균 10% 이상의 성장이 예상되는 곳이다. 따라서 완전한 디커플링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중국 내수용과 글로벌 시장용으로 이원화된 생산체계가 구축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번 사태는 제약산업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전반의 탈세계화 가속화를 상징하는 사례로 평가된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각국은 핵심 산업의 공급망 안정성 확보를 위해 리쇼어링이나 프렌드쇼어링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시장경제 질서가 효율성 중심에서 안정성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지각변동은 한국의 바이오·제약 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전망이다. 특히 삼성바이오로직스와 SK바이오사이언스 등 세계적 수준의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DMO)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현재 글로벌 CDMO 시장의 약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FDA 승인 시설과 첨단 생산 기술을 보유해 미국 기업들의 'China+1' 전략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최근 5년간 화이자, 모더나 등과 총 120억 달러 규모의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다만 한국 기업들도 중요한 도전 과제를 안고 있다. 2025년까지 약 5조원 규모의 생산시설 확충과 3,000명 이상의 전문인력 확보가 시급하다. 또한, 중국 업체 대비 30% 이상 높은 생산단가를 낮추고, 바이오시밀러 시장에서 중국의 공격적 가격정책에 대응할 전략 마련도 필요하다.
이번 제약산업 가치사슬 재편은 단기적으로는 의약품 개발 지연과 가격 상승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공급망의 안정성과 회복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한국과 같이 제조 기술력과 품질 관리 능력을 갖춘 국가들에게는 글로벌 가치사슬 내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전략적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세제 지원과 규제 완화, 전문인력 양성 등 구체적 육성책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업계는 생산 효율화와 기술혁신을 통한 경쟁력 강화에 주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