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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vs 직업, 미 의료계 세대 간 가치관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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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vs 직업, 미 의료계 세대 간 가치관 충돌

젊은 의사들 "삶의 질 보장돼야 환자 케어 가능"
고령 의사들 "환자 우선 가치관의 변화 우려"

의료계의 과다 노동, 환자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의료계의 과다 노동, 환자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사진=로이터

의사들의 과도한 노동시간과 업무 강도로 인한 번아웃이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학협회(AMA)에 따르면 의사들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59시간에 달하며, 절반 가량이 번아웃을 경험하고 있다.

2023년 메드스케이프(Medscape)의 '전국 번아웃 및 우울증 보고서'는 의사의 53%가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20% 이상 증가한 수치다. 전공과별로는 응급의학과(65%), 내과(60%), 소아과(59%) 순으로 번아웃 비율이 높았다.

의사들의 번아웃 주요 원인은 과도한 관료주의적 업무(60%)와 장시간 근무(39%)로 나타났다. 특히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 사용으로 인한 추가 업무 부담이 이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의료과실 위험 증가와 환자 만족도 저하로 이어질 수 있어 의료계의 시급한 해결 과제가 되고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의료계 내 세대 간 가치관의 충돌을 다룬 심층 기사를 통해 새로운 도전 과제를 조명했다. 핵심은 의사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기성세대는 의사직을 '소명'으로 여기며, 환자 치료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한다. 반면 젊은 세대는 의사직 역시 하나의 '직업'이며, 일과 삶의 균형이 보장되어야 양질의 의료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의료 환경의 구조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과거 개인 병원 중심이던 의료체계가 대형 의료 시스템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의사들은 자율성을 가진 독립적 전문가가 아닌 '직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됐다. 여기에 행정업무 증가, 보험사와의 갈등 등이 직업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의료 서비스의 질과 의료접근성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젊은 의사들의 근무시간 단축 요구가 현실화될 경우, 야간·주말 진료 등 필수의료 서비스의 공백이 우려된다.

존스홉킨스 의대 연구진의 자료에 따르면 의료과실로 인한 사망자가 연간 25만 명에 달하며, 이 중 상당수가 의료진의 피로와 판단력 저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 AI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와 누앤스의 최근 연구는 AI 기반 음성인식 및 자동기록 시스템 도입으로 의사 1인당 하루 평균 2시간의 문서작업 시간을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AI 진단보조 시스템의 도입으로 진단 정확도가 15% 이상 향상되었다는 보고도 있어, 새로운 기술이 의료 서비스의 질적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의료계도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한전공의협의회의 2023년 수련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공의들의 실제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87.3시간으로, 법정 근로시간인 주 80시간을 초과한다. 전공의의 36.2%는 주 100시간 이상 근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의료정책연구소의 2022년 전국의사조사는 개원의와 봉직의를 포함한 전체 의사의 주당 평균 진료시간이 45.2시간이나, 행정업무 등을 포함한 실제 근무시간은 이를 크게 상회한다고 밝혔다. 특히 상급종합병원 근무 의사들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60시간을 넘는다. 최근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을 둘러싼 갈등도 과중한 업무 부담, 열악한 근무환경 개선 등 의료계의 구조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의료계의 세대 간 가치관 충돌은 변화하는 의료 환경에 대한 적응과 혁신의 과제를 제기한다. 환자 안전과 의료 서비스의 질을 담보하면서도 의료진의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의료체계 모델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의료계와 사회가 함께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