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글로벌 질서의 근본적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11월 7일(현지 시각)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유럽 정상회의는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50여 명의 유럽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표면적으로는 통합과 자치를 강조했지만, 실상은 트럼프 시대 재도래에 대한 깊은 우려와 분열의 조짐이 감지됐다고 같은 날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유럽 내 민주주의 진영의 균열이다.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로 대표되는 포퓰리스트 세력은 트럼프의 당선을 환영하며 '유럽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반면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세상은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로 이뤄져 있다"며 유럽의 결집과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트럼프 시대의 도래가 유럽을 '친미 포퓰리스트 진영'과 '유럽 주도권 수호 진영'으로 양분시키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르반이 트럼프식 포퓰리즘과의 연대를 통해 기존 유럽 질서의 재편을 꾀하는 반면, 마크롱은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하려는 상반된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유럽이 이새로운 시대의 서막에서 분열의 조짐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 우려되는 것은 유럽의 양대 축인 독일의 정치적 혼란이다. 숄츠 총리의 연립정부 붕괴는 유럽의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을 가중하고 있다. 이는 트럼프 시대를 맞아서 유럽이 단일대오를 형성하기 어려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전통적으로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유럽 통합을 이끌어온 핵심 동력이었으나, 현재의 정치적 혼란은 독일이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히 숄츠 총리가 "우크라이나 지원과 국방 투자를 위해 사회 복지를 희생할 수 없다"고 밝힌 것처럼, 국내 정치적 불안정은 유럽의 전략적 결단과 신속한 대응을 제약하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입장차도 더욱 첨예해질 전망이다. 트럼프는 선거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지원 축소와 러시아와의 협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푸틴과의 타협은 유럽 전체의 자살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했으나, 미국의 정책 변화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 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한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를 넘어, 푸틴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려는 서방 동맹의 결속력이 시험대에 오를 것임을 예고한다. 특히 오르반과 같은 친러 성향의 유럽 지도자들이 트럼프의 입장 변화를 계기로 대러 제재 완화를 촉구할 가능성이 높아,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의 단일전선에 균열이 발생할 수 있다.
국제 통상질서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트럼프가 공약한 고율 관세 정책이 현실화될 경우,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보호무역주의 강화가 불가피하다. 유럽연합은 이에 대비해 집단적 대응을 모색하고 있으나, 개별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럽중앙은행(ECB)이 높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기준금리를 4.5%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은행은 올해 유로존의 경제성장률을 0.7%로 전망하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의 보호무역 정책이 현실화될 경우, 수출 의존도가 높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국의 경제는 더욱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나토의 미래도 불확실성이 증가했다.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트럼프의 국방비 증액 압박이 동맹 강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지만, 트럼프의 고립주의적 성향은 나토의 결속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는 러시아의 군사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유럽 안보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다.
1기 트럼프에 이어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자유민주주의와 다자주의 기반의 국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될 수 있음을 분명히 시사한다. 유럽은 미국의 리더십 약화에 대비해 전략적 자주성을 강화하려 하지만, 내부 분열과 경제적 도전 속에서 그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다.
이에, 향후 국제 질서는 민주주의 진영의 결속력 약화, 강대국 중심의 힘의 정치 부활, 경제 블록화 심화 등이 예상되며, 이는 글로벌 불확실성을 더욱 증폭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