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역의 차고와 거실이 중국 전자상거래 물류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이른바 '가족 창고' 현상의 확산이 미·중 무역질서의 새로운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연간 10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되는 이 시장이 주목받고 있다고 15일(현지 시각) 레스트오브월드가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확산된 이 현상의 배경에는 테무(Temu)와 틱톡(TikTok) 등 중국 이커머스 기업들의 급성장이 있다. 테무의 2024년 2분기 총 상품 가치는 120억 달러, 미국 매출 비중은 45%에 달한다.
중국 업체들은 그간 데 미니미스(de minimis) 규정을 활용해 800달러 미만 소포의 무관세 직접 배송을 선호했으나, 미국 정부의 규제 강화 조짐에 대응해 현지 물류 거점 확보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현재 미국 내 '가족 창고'는 약 5000개로 추산되며, 주로 의류, 전자기기, 생활용품을 취급한다. 평균 거래 규모는 창고당 월 2000~4000건이며, 패키지당 처리 비용은 1달러 수준이다. 특히 뉴욕 퀸즈, LA 한인타운, 시카고 차이나타운 등 아시아계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
물류 프로세스는 세 단계로 체계화되어 운영된다. 첫째, 중국에서 대량 입고된 제품이 가족 창고에서 품목별, 판매처별로 분류되어 재고 관리 시스템에 등록된다. 둘째,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주문이 접수되면 24시간 내 개별 포장과 배송 라벨 작업이 이뤄진다. 마지막으로 반품된 제품의 검수와 재판매 가능 여부 판단, 초과 재고의 할인 판매나 도매상 납품 등 재고 관리가 진행된다.
이런 현지 물류 시스템 구축으로 기존 중국 직배송 대비 배송 시간이 2주 이상에서 2~3일로 대폭 단축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장 조사기관 마켓플레이스 펄스는 '가족 창고' 현상이 과도기적 성격을 띤다고 분석한다. 이는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된다. 우선 개인 주거공간을 활용한 물류 처리는 화재 위험과 위생 문제 등 안전성 우려가 크다. 또한, 전자상거래 기업들의 성장에 따라 대규모 물량을 처리할 수 있는 전문 물류 시설의 필요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트럼프 재집권으로 예상되는 수입품 안전기준 강화와 물류시설 점검 확대로 비공식 물류 거점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프로로지스 자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미국 내 신규 창고 임대의 20%를 중국 물류·이커머스 기업이 차지했으며, 테무와 쉐인(Shein) 등 주요 기업들은 이미 전문 물류시설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는 '가족 창고'가 정규 물류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징후로 해석된다.
한편, 한국 내 중국 동포와 중국인을 포함한 중국계 인구는 2023년 말 기준 약 80만 명으로 집계된다. 이들은 주로 서울 대림동과 가리봉동, 인천 차이나타운 등에 밀집해 있다. 이 지역에서도 물류 관련 활동이 관찰되고 있으나, 한국의 물류창고업 관련 법규가 미국보다 엄격해 '가족 창고' 형태의 확산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물류창고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화물유통촉진법에 따른 시설기준을 충족하고 등록해야 한다. 주거지역 내 창고 운영도 건축법과 용도지역 규제 등으로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가족 창고' 확산 현상은 미·중 무역관계의 새로운 단면을 보여준다. 정부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서도 민간 영역은 창의적 해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의 탄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호무역주의 강화가 초래할 수 있는 시장 왜곡 현상을 시사한다.
향후 이 시장은 규제 강화와 물류 효율화라는 상반된 압력 속에서 재편될 전망이다. 특히 트럼프 재집권으로 예상되는 수입품 안전기준 강화와 물류시설 감독 강화는 현재의 비공식 '가족 창고' 운영을 사실상 어렵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중소 규모 물류업체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 일정 규모 이상의 업체들은 안전기준과 위생기준을 갖춘 정식 물류창고로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영세업체들은 대형 물류회사의 협력업체나 가맹점 형태로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 안전, 거래 투명성 확보, 공정 경쟁 환경 조성 등이 핵심 과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현재의 비공식적이고 즉흥적인 물류 처리 방식이 더욱 체계화되고 표준화된 시스템으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영세 사업자들의 시장 이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여, 새로운 형태의 미·중 무역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