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일본 전략 '벤치마킹'…미국 압박에 굴복 대신 '자율적 통제' 고심
전기차·배터리 등 핵심 품목 대상 가능성…미국 투자 유치 '맞교환' 저울질
전기차·배터리 등 핵심 품목 대상 가능성…미국 투자 유치 '맞교환' 저울질

중국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전기차나 배터리와 같은 제품에 대해 자체적인 수출 제한을 검토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지난 2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는 1980년대 일본이 미국의 무역 압력에 대응했던 전략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은 미국으로의 자동차 수출량을 자발적으로 줄이는 대신 가격을 인상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는 미국의 추가적인 수입 관세 부과를 막는 데 기여했다. 중국 정부 자문위원들에 따르면, 베이징 역시 미국의 관세 인상 및 기타 무역 장벽에 대응하기 위해 특정 품목의 대미 수출량을 제한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특히 미국이 핵심적으로 우려하는 전기차나 배터리 분야에서 중국이 유사한 조치를 취할 경우, 과도한 정부 보조금으로 낮은 이익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시장을 잠식하며 다른 국가 제조업체에 피해를 준다는 비판을 일부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첫 임기 동안 부과했던 관세에 더해 중국산 제품에 20%의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아직 미중 간 공식적인 협상은 진행되지 않았지만,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최근 허리펑 중국 부총리와의 통화에서 중국의 시장 왜곡 행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허리펑 부총리는 향후 트럼프 행정부와의 무역 협상을 이끌 핵심 인물로 전망된다.
미국 압박 수위와 중국의 셈법
중국 경제 관료들이 일본의 접근 방식을 모방하는 것을 고려하는 배경에는 미국의 잠재적인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시진핑 지도부는 더 큰 무역 공격을 피하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와 합의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1981년 처음으로 자동차 수출 제한에 합의했으며, 그 결과 이듬해 수출량이 약 8% 감소했다. 다트머스 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더그 어윈은 "당시의 제한 조치가 1980년대 중반에 특히 강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일본 기업들이 미국 현지 공장에서 미국 시장용 자동차를 생산하면서 자발적 수출 제한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어윈 교수는 일본이 수출을 제한했던 이유 중 하나로 "자국 기업들이 더 적은 수의 자동차를 판매하면서 대당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본 자동차의 평균 가격은 약 1000달러(현재 가치 약 3500달러) 상승했으며, 일본은 더 크고 품질 좋은 자동차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 자문위원들은 베이징 또한 미국 내 해당 분야 투자 기회를 얻는 대신 전기차와 배터리에 대한 수출 제한을 협상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일부 관료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미국 내 중국 투자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던 점을 들어 이러한 제안이 그에게 매력적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베이징의 경제 불균형은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최근 몇 년간 시진핑 주석의 제조업 중심 정책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이 정책은 국내 수요와 관계없이 공장들이 생산량을 늘리도록 장려하여 서방의 제재나 전면적인 갈등 발생 시에도 중국 경제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트럼프에 앞서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과도한 제조업 생산량이 세계 시장에서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중국 지도부에 거듭 경고해 왔다. 바이든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는 중국산 철강, 전기차 등에 대한 관세가 인상되기도 했다.
어윈 교수는 "무역 정책의 도구로 관세를 고집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가 중국으로 하여금 자발적 수출 제한을 수용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자발적 수출 제한의 현실적인 한계
다만 중국 자문위원들은 이번 수출 제한 논의가 베이징이 제조업 중심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의도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오히려 일부 관료들은 이를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 카드로 활용하고, 나아가 중국 산업의 가치 사슬을 끌어올리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어윈 교수는 과거 토요타와 같은 일본 수출업체들이 가격 인상을 통해 얻은 이익을 바탕으로 소형 저가 차량에서 대형 고수익 차량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고, 이는 미국 경쟁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이 일본의 전철을 밟는다면 바로 이러한 종류의 산업 업그레이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윈 교수와 다른 경제학자들은 자발적 수출 제한만으로는 미중 무역 불균형 전체를 해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대중국 무역 적자는 2950억 달러(약 432조 3225억 원)로, 이는 미국의 모든 교역국 중 가장 큰 규모다.
또 다른 난관은 중국 기업들이 멕시코나 베트남과 같은 제3국을 통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경우 자발적 수출 제한을 제대로 시행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수입을 선호하기 때문에 자발적 수출 제한이라는 아이디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현재까지 베이징은 트럼프 대통령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 기관에 미중 경제 관계에 대한 평가를 지시했으며, 4월 초에 나올 예정인 이 검토 보고서는 행정부 내에서 중국과의 무역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결정하는 과정을 촉발할 것이다.
게이브칼 드래고노믹스의 창립 파트너 겸 연구 책임자인 아서 크뢰버는 "만약 내가 중국이라면 자발적 수출 제한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거나, 최소한 대비책으로 준비해 둘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