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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반도체 기술 자립 '빨간불'… ASML CEO "지금 보호 못 하면 핵심 기업 떠난다" 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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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반도체 기술 자립 '빨간불'… ASML CEO "지금 보호 못 하면 핵심 기업 떠난다" 쓴소리

푸케 사장,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서 유럽 정책 결정자들에 경고 메시지
미·중 갈등 속 유럽의 소극적 대응 비판…"관료주의·느린 의사결정 발목 잡아"
사진설명: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설명: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 사진=로이터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ASML의 크리스토프 푸케 최고경영자(CEO)가 유럽의 기술 경쟁력 약화에 대해 강한 경고를 보냈다. 그는 이코노미스트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유럽이 자국 기술 기업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 미국의 보호주의 정책과 아시아의 경쟁 심화로 인해 핵심 기업들이 투자를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ASML은 인공지능(AI) 가속기부터 스마트폰 칩에 이르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식각 장비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기업이다. 자동차나 세탁기에 사용되는 비교적 단순한 프로세서용 장비 시장에서도 ASML은 9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러한 독점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ASML은 최근 몇 년간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의 대중국 AI 기술 제재로 인해 최첨단 장비의 중국 수출이 금지되었고, 기본적인 장비 수요마저 감소하면서 지난해 10월에는 2025년 매출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ASML의 주가는 한때 5분의 1이나 급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푸케 CEO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면서도 유럽 정책 결정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유럽은 매우 강력한 산업 기반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유럽의 챔피언 기업들이 미국의 보호주의적 정책이나 아시아의 경쟁 심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며 "만약 유럽이 이들 기업을 더 잘 지원하지 않는다면, 투자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ASML 역시 이러한 압박감을 이미 느끼고 있다고 푸케 CEO는 밝혔다. 그는 미국의 대중국 수출 통제가 회사 사업에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럽의 관료주의와 느린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하며 "유럽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오래 걸린다. 우리는 더 빠르고 더 결단력 있게 움직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푸케 CEO의 이번 경고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공급망의 취약성을 경험한 유럽이 핵심 기술 분야에서도 유사한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나왔다. 유럽연합(EU)은 이미 반도체 산업을 포함한 핵심 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푸케 CEO와 같은 업계 리더들은 이러한 노력이 아직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푸케 CEO는 유럽이 단순한 보조금 지급을 넘어 혁신적인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 연구 개발 투자 확대, 규제 장벽 완화, 숙련된 인력 양성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유럽이 미국 및 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 관계에서 더욱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ASML은 유럽 기술력의 상징적인 기업이다. 이 회사의 성공은 네덜란드와 유럽의 혁신 역량을 입증하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푸케 CEO의 경고는 유럽 지도자들이 현재의 성과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치열해지는 글로벌 경제 경쟁 속에서 유럽은 자국의 핵심 산업을 보호하고 미래 성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속하고 과감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ASML과 같은 유럽의 대표 기업들이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날 수 있다는 그의 우려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