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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IBM·라피더스, '반도체 부활' 공동 전선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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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IBM·라피더스, '반도체 부활' 공동 전선 구축

경제 안보 시대, 흔들리는 공급망 속 미국·일본 밀착
2나노 공정 도전, 특주품 전략으로 글로벌 틈새시장 정조준
미국 IBM과 일본의 차세대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가 '반도체 부활'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손을 맞잡았다. 경제 안보가 핵심 화두로 떠오른 시대, 불안정한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미국과 일본이 첨단 반도체 기술 협력을 통해 새로운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IBM과 일본의 차세대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가 '반도체 부활'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손을 맞잡았다. 경제 안보가 핵심 화두로 떠오른 시대, 불안정한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미국과 일본이 첨단 반도체 기술 협력을 통해 새로운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사진=로이터
최첨단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하는 일본 라피더스가 1일 홋카이도 공장에서 시제품 라인을 가동한다고 닛케이가 지난 3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는 미국의 경제 안보 확보에 중요한 발걸음으로, 미국 IBM이 기술 제공과 기술자 육성 등 전폭적인 지원에 나선 결과다. 미중 갈등 심화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는 가운데, 글로벌 공급망 재편 움직임은 일본 반도체 산업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가 될지 주목된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3월 중순,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에는 일본인 반도체 기술자들이 잇따라 도착했다. 이들은 미국 뉴욕주 북부 올버니에 있는 IBM 연구 개발 거점에서 IBM 기술자들과 함께 최첨단 반도체 설계 및 생산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수받은 라피더스의 핵심 인력이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신치토세 공항 동쪽에 자리 잡은 라피더스 공장이다. 4월 1일 공장 가동을 앞두고 현장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200대 이상의 장비가 공장으로 들어왔으며, 우선 150명 규모로 시제품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라피더스는 올여름까지 시제품 출하를 목표로 한다.

◇ 미국-일본 반도체 협력의 배경


2024년 말, 라피더스 공장을 직접 시찰한 IBM 반도체 부문 최고 책임자 무케시 카레 씨는 "한때 세계를 석권했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돌아왔다"며 깊은 감회를 드러냈다. 그는 IBM이 인재 육성뿐만 아니라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기초 기술까지 라피더스에 제공해왔다고 강조했다.

IBM이 라피더스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배경에는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역량을 강화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있다. IBM은 국방부 등 미국 정부에 '메인프레임'이라 불리는 대형 컴퓨터를 납품하며, 핵심 부품인 반도체의 기술 유출 및 전용을 막기 위해 자체 개발을 고수해왔다.

반도체 업계는 2000년대 이후 막대한 설비 투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설계와 제조를 분리하는 수평 분업 구조가 일반화되었다. IBM 역시 2015년 반도체 제조 부문을 분사하고 반도체 기술 연구 개발에 집중해왔다. 다만 생산을 위탁했던 한국 삼성전자는 최첨단 제품 양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전체의 상황을 보면, 최첨단 반도체 연구 개발과 양산을 주도해 온 인텔이 2010년대 후반부터 반도체 미세화 기술 경쟁에서 대만 TSMC 등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결국 2024년에는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며 경영난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기술을 기반으로 한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새로운 제조 업체의 확보는 미국에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다. IBM 연구 개발 부문 최고 책임자 다리오 길 씨는 "반도체는 같은 생각을 가진 국가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며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해 라피더스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도체는 회로 선폭이 2나노미터(nm, 10억분의 1미터) 수준으로 미세화되면 기본 구조가 완전히 바뀐다. 일본은 2000년대에 반도체 회로 미세화 경쟁에서 뒤처졌지만, 라피더스의 고이케 아쓰요시 사장은 이러한 기술 변화의 시기를 "일본이 세계를 따라잡을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변수도 존재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미국 외에서 생산된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 의향을 밝힌 바 있다. 이는 아시아 수입에 의존해온 최첨단 반도체 생산을 미국 내로 다시 가져오려는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TSMC는 1000억 달러(약 147조1000억 원)를 투자해 미국에 3개의 첨단 로직 반도체 공장을 추가할 계획이다. 이는 일본에만 생산 거점을 둔 라피더스에 반도체 생산을 위탁할 미국의 우선순위를 낮출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 라피더스의 차별화 전략


라피더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틈새 시장인 특주품(특정 고객의 요구에 맞춰 주문 제작되는 반도체) 생산에서 활로를 찾겠다는 전략이다. 기존 방식처럼 수십 장의 웨이퍼를 한 번에 처리하는 대신, 웨이퍼 한 장씩을 빠르게 처리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TSMC가 주로 수주하는 애플이나 엔비디아 등의 대량 생산품이 아닌, 주문량이 적은 신흥 반도체 기업의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미 라피더스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영업 거점을 마련하고 신흥 기업들의 수요를 개척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인 미국 텐스토렌트의 설계 담당 웨이한 리엔 씨는 "우리와 같은 작은 회사는 공급망을 다변화해야 하며, 라피더스가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라피더스는 2027년 양산 시작까지 추가로 4조 엔(약 39조 4648억 원) 규모의 자금이 필요하다. 정부 지원 외에도 민간 투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토요타 자동차, NTT, 소니 그룹 등 기존 주주들은 추가 출자 의향을 밝혔지만, 일각에서는 "양산 실적이 없는 기업에 대한 투자는 위험이 크다"는 우려도 나온다.

라피더스가 일본과 미국의 고객 및 주주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2나노 반도체 시제품 라인을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가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침체에 빠졌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세계적인 선두 주자로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