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으로 읽는 21세기 도덕경' 제10장

가령 공자의 중용은 차별하지 않는 인간사의 최상의 진리다. 너와 나, 귀하고 천하고를 차별하지 않으면 다툼이 있을 수 없으므로 세상은 더없이 평안할 것이다. 하지만 공자 자신이 과연 중용을 지켰을까? 사람의 신분을 귀천으로 차등 둔 그의 언행이 자신의 학설에 합당한 것이었을까?
그에 반해 석가모니 붓다나 예수 그리스도는 귀천을 차별하지 않음으로써 중용의 덕을 실천했다. 이처럼 차별하지 않은 성품은 도를 깨달은 자로서 진정한 성인이라 할 것이다. 진정한 성인은 불가사의한 초월적 존재로서 죄지은 자를 구제할 뿐 어떤 위선도 없고 죄도 짓지 않는다. 그리할 수 있는 최상의 법이 바로 혼백을 하나로 묶는 명상 수행이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고요함이었다. 고요함은 어떤 차별심도 없다. 도가 바로 그러하다. 도는 본래 스스로 탄생한 자로서 상대적 개념이 없다. 상대적인 것이 없으므로 오직 고요할 뿐 이것이다 저것이다 차별함이 없으며 오로지 덕만을 끊임없이 베푼다. 그리고 덕을 베푸는 대상 역시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는다. 자연을 낳고 길러줌이 그러하다.
도의 기운은 더러운 시궁창이건 깨끗한 샘터이건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덕을 베푼다. 아름다운 꽃이건 볼품없는 꽃이건 귀천을 가리지 않으며, 범처럼 포악하건 양처럼 착하건 차별 없이 무위로 베풀기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덕은 기운이다. 차고 덥고 습하고 건조하고 따뜻하고 뜨거운 기운이 도의 쓰임새다. 도에 이른 마음이 그러하여 차별 없이 베풀기만 하니 성인이 곧 도인이고 도인이 성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본성이 본래 도인이었으므로 누구나 성인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욕망이 들끓는 세속성이 방해하므로 도에 이르지 못한다. 즉 물질에 종속된 마음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은 번뇌를 일으켜 본성인 도를 지배하므로 도를 알지 못한다. 본성이 번뇌에 사무치면 그 마음 구멍은 하나인데 뱀 혓바닥처럼 두 가지로 갈라져 나온다. 바로 분별하고 차별하는 마음이 그러하다. 따라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도록 명상 수행으로 마음을 하나로 묶으면 그 즉시 도인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 쉬워 일심 도에 이르는 것이지 대단히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뜻은 이루어진다. 그 언젠가가 어느 시기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다. 이승에서 안 되면 후생에서, 후생에서 안 되면 그 후생에서 기어코 뜻을 이루어 성인이 되어 초월적 존재로서의 도인이 될 수 있다.
번뇌를 없애고 일심에 도달하는 방법이 바로 혼백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번뇌는 육신의 정기인 넋[魄]이 세속에 탐착하여 일어난다. 그중에서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피부로 감각되는 데서 번뇌가 비롯된다. 따라서 오관(五官: 눈·귀·코·혀·감촉)에 혼(魂·마음)을 집중해 혼백을 일치시키면 번뇌가 사라진다.
특히 코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다가 마음을 일치시켜 오관을 관하면 차별이 없는 절대적 진리[眞如]에 도달할 수 있다. 들이쉬는 숨에서 천지에 가득한 도의 기운을 들이켜서 온몸에 고루 퍼지게 하고, 날숨에서 몸속의 탁한 기운을 내보내면 몸과 마음이 청정해져서 번뇌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자는 화두를 이렇게 던졌다. ‘혼백을 하나로 묶어 온몸에 기를 부드럽게 보낼 수 있느냐!’라고.

정경대 한국의명학회 회장(종교·역사·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