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겨울 안정적일 것으로 전망됐던 유럽 가스시장이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러시아 국영기업 가스프롬이 오스트리아 최대 에너지기업 OMV와의 대금 분쟁으로 공급을 중단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마지막 가스관마저 연말 폐쇄를 앞두고 있어서다. 19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은 이 같은 공급 불안이 유럽의 에너지 안보를 다시 시험대에 올려놓았다고 보도했다.
가스프롬은 지난 17일 독일 공장 미납품에 따른 중재 배상금 문제로 OMV에 대한 가스 공급을 전격 중단했다. OMV가 2억3000만 유로의 배상금을 가스 대금과 상계 처리하겠다고 나서자, 가스프롬이 이에 맞서 공급 중단으로 대응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경유 물량의 40%를 담당해온 OMV 공급 차질은 유럽 가스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중대 변수가 됐다.
주목할 점은 공급 중단 이후에도 러시아산 가스가 여전히 오스트리아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 구간 가스 흐름은 하루 2700만 입방미터에서 2260만 입방미터로 17% 감소했을 뿐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OMV 물량이 다른 유럽 구매자들에 의해 흡수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회 공급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불안감은 고조되고 있다. 네덜란드 TTF 가스 선물가격은 메가와트시당 46유로까지 치솟아 1년 만에 최고치를 보였다. 가격 상승 영향은 글로벌 LNG 시장으로도 확산됐다. 시장조사기관 케플러에 따르면 아시아로 향하던 LNG 선박 최소 5척이 유럽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더 큰 우려는 우크라이나 경유 가스관의 운명이다. 키이우 정부가 러시아와의 5년 수송계약 연장을 거부하면서 연말이면 이 마지막 수송로마저 폐쇄될 전망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이 가스관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슬로바키아 가스 수요 65%를 담당하고 있어 대체 공급망 확보가 시급한 상황이다.
이번 사태는 러시아-유럽 간 에너지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유럽 가스시장의 35%를 장악했던 러시아는 이제 노르웨이, 미국, 카타르에 주도권을 내줬다. 푸틴 대통령이 최근 2년 만의 독일 숄츠 총리와 통화에서 에너지 협력 재개 의사를 밝혔지만, 이는 현재의 시장 상황과 동떨어진 제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럽의 높은 가스 저장률과 대체 공급선 확보로 당장 공급 충격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가스 저장고는 90% 이상의 충전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노르웨이와 미국으로부터의 안정적인 LNG 공급계약도 확보한 상태다.
이번 사태는 글로벌 가스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앞당길 것으로 보인다. OMV 공급 중단과 우크라이나 가스관 폐쇄 위기는 유럽의 마지막 남은 러시아 가스 의존도마저 끊어내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이미 유럽은 카타르, 미국과의 장기 LNG 계약을 확대하고 있으며, 독일을 중심으로 신규 LNG 터미널 건설도 서두르고 있다.
결국, 유럽은 단기 수급 안정과 함께 장기적 에너지 안보 강화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LNG 인프라 확충과 공급선 다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다. 러시아라는 오랜 공급자를 잃은 유럽 가스시장이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본격화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