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혁신 기업들이 미국 방위산업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2일(현지시각) 팔란티어와 안두릴 등 주요 기술기업들이 약 12개사와 함께 정부 국방계약 수주를 위한 컨소시엄 구성을 추진 중이라 보도했다. 이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본격적 방산시장 진출 선언으로, 전통 방산업체들의 수십 년 독점 구도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번 움직임의 핵심은 현대전의 패러다임 변화에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과 인공지능이 전세를 가르면서, 첨단 기술의 군사적 활용이 전쟁에서 결정적 경쟁력으로 부상했다. 스페이스X, 오픈AI, 스케일AI 등이 참여를 검토 중인 컨소시엄은 차세대 무기체계의 핵심인 소프트웨어와 AI 기술 결합에 주력할 전망이다.
시장도 이러한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의 시가총액은 1690억 달러를 기록해 전통 방산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우주탐사기업 스페이스X의 기업가치는 3500억 달러에 이르며, 자율무기 개발사 안두릴도 140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최근 K방산의 글로벌 약진이 주목받고 있지만, 방산시장의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성과가 지속될지는 불확실하다. 폴란드, UAE 등과 맺은 대규모 수출 계약은 대부분 전통적 플랫폼 무기체계에 집중되어 있다. 미래전에서 더욱 중요해질 AI 기반 전투체계, 무인자율무기, 사이버전 역량 등에서 뒤처진다면, 한국의 방산 경쟁력은 급격히 약화될 수 있다.
이러한 격차 해소를 위해서는 방산업계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삼성의 AI 반도체와 로봇 기술, 네이버의 자율주행과 클라우드 플랫폼, 카카오의 AI 알고리즘과 데이터 분석 역량 등 국내 IT 기업들이 보유한 첨단 기술을 방산분야로 적극 유입해야 한다. 현대로템, 한화시스템 등 주요 방산업체들은 이미 빅테크 기업들과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 글로벌 최고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 차원의 제도적 지원도 시급하다. 현재 방위산업은 높은 진입장벽과 까다로운 규제로 인해 민간 기술기업의 참여가 제한적이다. 미국처럼 혁신적인 기술기업들이 쉽게 방산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군과 민간의 기술협력을 촉진하는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국방 R&D 예산의 배분에서도 소프트웨어와 AI 분야의 비중을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재집권은 이러한 방산산업의 변화를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이미 전임 시절 우주군 창설과 실리콘밸리 인재 영입을 통해 기술 기반 국방 혁신을 추진한 바 있다. 재집권 시 중국과 러시아 등의 도전을 견제하기 위해 첨단 무기체계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방산시장의 디지털 전환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대형 플랫폼에서 네트워크화된 자율무기 체계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전통 방산업체들도 기술 혁신이 불가피해졌다. 실리콘밸리의 도전은 단순한 시장 진출을 넘어 전쟁 수행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한다. 한국의 방산업계도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신속한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