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가스 시장이 지정학적 리스크와 수급 불균형이 겹치며 새로운 에너지 안보 위기에 직면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4일(현지시각) 유럽연합(EU)이 에너지 위기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가스 저장고를 소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스 인프라스트럭처 유럽(GIE)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9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EU의 가스 저장량이 약 19% 급감했다.
EU의 가스 저장 위기는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예년보다 추운 날씨로 난방 수요가 급증한 가운데, 재생에너지 발전에 있어 중대한 도전 과제를 나타내는 현상을 말하는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로 인한 재생에너지 발전 부진으로 발전용 가스 수요도 크게 늘었다. 컬럼비아대학교 글로벌 에너지정책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북서유럽 9개국의 산업용 가스 수요는 전년 대비 6% 증가했다. 특히,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각각 33%, 28%의 저장량 감소를 기록하며 EU 평균을 크게 상회했다.
러시아 가스 수급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감지된다. EU의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는 2021년 42%에서 2023년 14%(LNG 5.3%, 파이프라인 8.7%)로 급감했다. EU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LNG 터미널을 확충해 2023년 40bcm, 2024년 30bcm의 추가 수입 능력을 확보했으며, 노르웨이산 파이프라인 수입도 연간 90bcm으로 늘렸다.
그러나 EU는 제재에도 불구하고 가격 경쟁력을 이유로 2023년 러시아산 LNG 수입량을 크게 늘려 시장 수요에 대응했다. 특히 벨기에와 스페인, 프랑스를 중심으로 러시아산 LNG 수입이 증가했다.
이런 가운데 새로운 지정학적 리스크도 부상하고 있다. 2024년 말 우크라이나 경유 러시아 가스 운송 계약이 만료된다. 현재 EU 가스 수입의 5%를 차지한다. 여기에 트럼프의 취임이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트럼프는 EU가 미국산 에너지를 대규모로 구매하지 않을 경우 관세 부과를 예고했다.
시장은 불안 징후를 보이고 있다. EU의 가스 저장량은 2024년 10월 95%로 법정 의무량인 90%를 상회했으나, 최근 75%까지 급감했다. 내년 여름 인도분 가스 가격이 겨울 인도분보다 높게 형성되는 이례적 현상이 나타나며 재충전 비용 상승이 우려된다.
EU는 이러한 위기에 대응해 REPowerEU 계획을 통해 2025년 3월까지 가스 소비 15% 감축을 추진 중이다. 이미 2023년 기준 총 가스 수요는 위기 이전 대비 20% 감소했으나, 최근 산업 수요가 회복세를 보이며 감축 목표 달성이 불투명해졌다.
가스 시장 전문가들은 2026년 말까지 유럽 가스 가격이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등의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다. EU는 2040년까지 가스 수요를 84% 감축하는 장기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나, 단기적으로는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의 균형이 과제다. 이러한 유럽발 가스 시장 불안은 글로벌 LNG 시장의 수급 불균형을 심화시키며, 한국을 비롯한 주요 LNG 수입국의 조달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어 각국의 장기적 에너지 안보 전략 수립이 시급한 상황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